영토문제연구특별위원회 강연회/ 한일관계의 위기와 극복방안의 모색(2014.10.27)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한일관계의 위기와 극복방안의 모색
위기에 직면한 한일관계
정치?외교 면에서 한일관계가 심상치 않다. 서로 서먹서먹하고 반신반의하고 있다. 한일 양국에서 새 정부가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호협력의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의 데면데면한 관계는 요즈음 시민 사회로까지 확산되었다. 한일관계가 이렇게 악화된 최근의 직접적인 원인은 2011년 12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수상이 교토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한 이후 양국 정부와 국민 레벨의 갈등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의 파장은 깊고 넓어서, 한일관계의 악화에 집접 불을 당긴 양국의 수뇌가 퇴진하고, 일본에서 2012년 12월 26일 자유민주당의 아베 신조 정부가, 한국에서 2013년 2월 25일 새누리당의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좀처럼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번 위기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래에는 한일 양국의 한쪽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나빠졌던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다. 양국에서 거의 동시기에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새로운 비전이나 건설적인 의견이 별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위기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접근 필요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의 각국 분위기로 봐서는 유감스럽게도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 정부가 ‘영토문제’와 역사문제의 원인과 來歷을 직시하고, 어느 쪽이든지 상대방에게 대담하게 양보하면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희망사항일 뿐이다. 어느 나라의 어느 지도자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영토문제’와 역사문제에 대해 타협과 양보를 할 수 있겠는가?
한일 양국에서 최근에 출범한 새 정권은 모두 내셔널리즘을 강하게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다 양국 정부에는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국민의 지지를 모으는 好材로 활용하려는 생각을 가진 인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국민의 애국심과 영토주권, 역사주권은 표리일체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권은 국민의 그러한 심리를 자극하여 인기와 지지를 확보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렇게 보면 한국과 일본이 당면하고 있는 현안, 곧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 악화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거나, 2012년 8월 이전의 수준으로 회귀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최대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영토와 역사 내셔널리즘이 약화되지 않는 동안에는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을 억누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서로의 처지와 언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지금의 갈등이 더 심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 정도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 정도의 방책은 될 수 있다고 자위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토와 역사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 일본과 러시아는 내버려 두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영토와 역사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독도문제는 단호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영토문제’인 독도에 관해서는, 일본이 도발하면 한국이 영유권을 더욱 강화하는 조처를 취해온 것이 종래의 관행이었다. 독도는 현재 한국이 엄연하게 영유하고 있는 국토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독도를 먼 바다에 홀로 솟아 있는 돌덩이가 아니라 영토주권의 상징이자 대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독립의 표상으로 여긴다. 일본인이 후지산을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앙과 國粹의 대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일본이 이런 독도를 어떻게 다시 차지한단 말인가? 한국인은 꿈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인은 미국이 후지산을 빼앗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일본은 전쟁과 같은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독도를 빼앗지 않는 한 현재의 상황을 변경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독도를 ‘영토분쟁’으로서 이슈화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앞장서서 독도를 이슈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국은 오히려 독도가 ‘분쟁지역’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세심하고 단호하게 관리하는 쪽이 낫다. 일본은 한국의 이러한 사정과 방침을 이해하고 용인해야 한다. 그 대신에 다른 분야에서 서로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독도가 두 나라 사이에서 다른 현안을 압도하는 큰 문제로 부상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독도 이외의 다른 사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는 분위기를 강화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게 독도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에서 점차 멀어져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연히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더욱 기정사실화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동해를 한일 양국이나 연안 국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지중해로 발전시키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동해는 현재 황해에 비해 물자·인간·정보·문화 등의 왕래가 뒤처지고 있다. 동해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촉진하는 지중해가 되도록 발전시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륙과 해양의 번영을 매개하는 허브가 된다. 그리고 동해 속의 독도는 한일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공영을 선도하는 상징으로 부각될 것이다. 독도가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와 협력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사 처리’의 경험 속에서 역사문제 극복의 지혜를 찾을 것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조처를 토대로 하여 응분의 해결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먼저 일본은 정부레벨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 일본에서 차기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유력한 정치인들이 일본의 책임, 사죄, 배상 등을 거부하고, 오히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모집이나 강제징용자의 피해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과 논리는 사실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정부가 책임, 사죄, 배상 등을 실현하는 데는 양국의 처지와 여론 등을 감안하여 유연성과 탄력성을 용인해주어야 한다. 문구의 표현이나 실행의 방법 등은 서로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적절히 조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다룰 떼는 일본정부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써온 노력에 대해서도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입법 등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일정한 범위에서 보상과 지원을 해왔음을 평가해주어야 한다. 물론 공적을 따진다면 피해자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면서 지금의 수준까지나마 성취할 수 있도록 진력한 시민단체 등의 역할을 제일 높게 평가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功이 있으면 過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부터는 한일 양국의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그 동안 해온 일에 대해 면밀하게 재검토하면서 그 功過를 따져보고 잘 한 점은 칭찬하고 못한 점은 반성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관련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여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좀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피해자가 모두 고령임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조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양국의 관련 당사자들은 모두 小利에 집착하지 말고 大利를 추구하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한일미래재단’이나 ‘한일우호신뢰재단’을 설립하여 역사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꾀할 것
한국과 일본은 불행한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평화와 공영의 미래를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 여기에는 독일이 만든 ‘기억·책임·미래’와 같은 재단이 참고가 될 것이다.
2000년 8월에 독일 의회를 통과하여 설립된 『기억·책임·미래재단』(Remembrance·Responsibility and Future Foundation, EVZ : Erinnerung·Verantwortung·Zukunft)은 독일의 6500여개 기업(50%)과 연방정부(50%)의 후원을 통해 52억 유로(8조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2001~2007년 동안 나치즘 시절의 강제노역, 노동자에게 대한 피해 배상을 실시했다. 그 중에서 44억 유로(6조원)의 기금을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핵심 과제이었던 피해 배상 사업은 2007년에 완료하고, 이후 아래와 같은 분야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① 나치 역사 문제 및 현 독일 내 다민족 문제 : 20세기 폭압적 역사에 대한 국내외 연구 활동 지원·장려, 유대인의 독일 사회에 대한 기여·역할 재조명 및 일반인의 인식제고, 현 독일사회 내 이민자 갈등문제 해소를 위한 문화간(Inter-Cultural) 이해 증진.
② 인권문제 관련 활동 : 역사를 통한 인권교육, 다큐멘터리 제작, 후속세대 교육·장학 사업 등.
③ 나치즘 피해 당사자 지원 : 생존 피해자의 처우 개선과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위한 프로그램 운영. 조직 및 예산을 살펴보면, ; 5개 부서(Public Relations, Legal Advise , Department of Programs, Administration, Finance), 총 30여 명의 상근 직원 근무. 3억 5천 만 유로(5천 3백억 원)의 기금 수익(122억 원)으로 동 재단 운영 및 각종 사업 추진.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기업 등이 함께 출연하여 독일의 경우처럼 ‘한일미래재단’ 또는 ‘한일우호신뢰재단’을 만들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장학, 그리고 일반인에 대한 교육과 기념 등의 사업을 한다면,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상당히 완화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세력의 재편과정을 지켜보면, 위와 같은 제안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에 불과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내셔널리스트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공동체의 실현을 향한 장정에 나서자
세상일은 窮卽明이고 正反合인 경우도 많다. 한국과 일본에서 국가와 민족 에 대한 召命意識이 강한 사람들이 집권했기 때문에 그만큼 통 큰 해결방안이 마련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다. 특히 박 대통령과 아베 수상은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보수주의에 기반을 둔 투철한 국가관, 안전보장, 애국심 등을 강조하고 있다. 둘 다 지난 4월에 별세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좋아한다. 先祖代부터 친교를 맺어온 두 정상은 한일관계의 개선이 진정한 국익, 안보, 애국 등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 쉽게 합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국적?전략적 차원에서 역사와 독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릴 지도 모르겠다. 지금 동아시아공동체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제국의 경험을 가진 중국이나 일본은 역사의 업보 때문에 이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역사의 원죄가 없는 한국이 좀 더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영토와 역사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다시 부상한 요즈음, 한국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켜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는 국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에 힘써야 한다.
이번에 돌출한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국민이 보여준 성숙한 태도는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7년 전인 2005년만 하더라도 ‘독도문제’와 야스쿠니참배문제가 불거졌을 때 정부는 일본과 문화 스포츠 등의 교류를 중단했다. 지방자치기구도 이에 따르고 국민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와 국민 모두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다른 부문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주장할 것은 당당히 주장하되 교류와 협력은 그대로 추진했다.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다른 부문과 결부시켜 한국을 압박한 것은 오히려 일본 정부와 국민이었다. 중국에서 폭동과 유사한 반일시위가 전국을 휩쓴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번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역설적으로 한국이 앞으로 일본과의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정부, 학자, 시민 등은 이번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隣近諸國의 정부, 연구자, 교육자, 운동가 등과 밀접하게 교류·협력하면서 ‘영토문제’와 역사문제의 극복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에 두어야 한다. 혼자 가는 길은 외롭고 힘이 들지만 함께 가는 길은 즐겁고 힘이 난다. 憲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