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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토론회-기성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과 그 해소방안을 위한 토론 1
관리자 2012-01-12 7,431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과 쇠락 裵成東 (헌정회 정책자문위원, 11-12대 의원) * 정당 발전 : 한국 정당정치의 특이성 해방 후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을 때 제일 많을 경우 344개였다고 한다.(최한수, 한국정당정치변동) 크게 뭉치기보다 제 각기 살림 차린 결과였다고 할까. 1948년 첫 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걸러진 결과 국회의원 5명 이상을 낸 정당이 4개였고 무소속이 85명이나 되었다. 정당이라기보다 정파연합이라 해야 할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 한국민주당이 29명이었다. 제헌의회는 경험과 식견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은 했어도 국가건설에 대한 준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건국에 즈음해 보니 헌법 학자라고는 없고 정치학을 제대로 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승만이 박사라고 해도 국제관계가 학위논문이었다. 헌법은 일제시대 고문관(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군수를 지낸 젊은 사람이 기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제헌국회에는 그래도 많은 명망가들이 진출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대단히 성실하게 의사(議事)에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비판과 내각제 개헌이 마땅치 않았던지 ‘천하에 둘도 없는 국회’라고 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처럼 정당을 싫어했다. 그러던 그가 집권을 위해 정당을 만든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파동을 통해 개헌하고 직선제로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만든 자유당과 이에 맞선 민주당의 대결로 한국의 본격적인 여야대결의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당시 자유당은 그야말로 제 멋 대로여서 자유의 뜻을 네거티브하게 하였는데 일본의 자유당, 필리핀의 자유당과 더불어 독선과 부패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었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자유당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민주당의 독무대가 되었으나 이것이 신구파로 갈라져 보수양당제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자 다시 관제 민주공화당이 주격(主格)으로 등장하고 민주당은 그로부터 정통야당이 된다. ‘정통’이란 말에는 야당신세를 면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선거를 해도 여야가 바뀌지 않는 이른바 1.5정당제가 된 것이다. 유신시대는 대통령이 시키는 국회의원이 1/3이 있었기 때문에 야당의 발전에 한계가 지워졌었다. 이것은 제5공화국에서 다소 완화되긴 해도 정권은 바뀌지 않도록 제도가 만들어졌고 정당은 관제이던 민주정의당과 2·3 중대라고 불리던 야당들이 있었다. 이러한 규제적 정당제도가 40년가량 지속된 끝에 여소야대 현상이 생겼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나온 3당 합당이 정당정치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김영삼은 투쟁과 선거로 집권한 것이 아니고 야합의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김대중 역시 야합의 책략(DJP)으로 집권했다. 노무현 역시 정몽준이란 어울리지 못할 상대와 야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정상적인 정권교체였다고 할 것이다. 선거를 시작한지 거의 6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 사이 여당은 집권자와 명멸을 같이 했고 야당도 보스가 누구냐에 따라 정당이 다시 만들어지고 경우에 따라 간판이라도 바꿔 달아야 했다. 한국의 정당이 여당(與黨), 야당(野黨)으로 표현되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내림을 받은 것이다. 서양에서는 집권당(governing party), 반대당(opposition party)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야(pro·opposition)로 표현했는가? 정권(대통령)이 먼저 있고 관제로 당을 만들었으니까 여당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일본제국의 초기 의회에는 정당이 있었지만 야당만 있었고 후일에 여당은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당이라고 불리어진 것이다. 한문으로 풀이하면 ‘여’는 정권을 도와주는 것이며 ‘야(野)’란 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되었다는 뜻이다. 권좌로부터 내려오면 ‘하야(下野)’라고 하지 않나. 일본에서는 의원내각제를 하면서도 집권당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정권을 잡고 당을 만들었지, 정당이 집권한 적은 없으니까 여당이란 표현이 맞다. 역대대통령은 자기 당을 만들었고 또 여러 차례 임기 말이 되면 당으로부터 쫓겨났다. 1987년 노태우 당선자는 정권인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민정당이 정권재창출을 했는데도? 기실 민정당이 집권한 것이 아니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것이며 당은 보조적 역할을 했을 따름이라는 판단이었다. 죽으라고 뛴 당은 기가 죽었다. 그는 임기 중에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제3공화국에서 헌법에 정당조항을 넣고 정당법을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과 학자들은 정당이 헌법에 올라갔다고 해서 대단한 발전인 것처럼 자랑했으나 사실은 정당정치를 규제하기 위한 법이었다. 정치를 법에 묶은 것이다. 서독 같은 국가에서는 공산당의 불법화가 그 목적이었다. 한국도 그런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로동당과 비슷한 정당이 생겨도 그냥 두고 있는 정당법, 헌법재판소는 목적을 저버린 셈이다. 이상이 간단한 한국의 정당 정치의 요약이다. 선진 민주국가의 패턴과는 다른 한국적 정당정치다. 하나의 정당이 20년을 존립한 적이 없고 당명을 바꾼 것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그 평균수명은 4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정치의 중심역할을 했으니까 정당정치가 발전해 왔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정당 쇠락 관제여당, 어용야당이라고 해도 60년대부터 90년대 까지는 정당정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원도 여당의 경우 보통 100만이라 했고 선거 때면 150만으로 늘어나곤 했다. 집권가능성이 희박하던 때지만 제1야당도 30만 내지 50만이라고 했다. 당원들의 집회가 자주 있었고 연수/훈련도 했다. 공화당과 민정당 그리고 신한국당은 꽤 큰 규모의 훈련/연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연수원장을 맡았던 1983-5년의 2년 동안 모두 21만 여명의 당원교육을 했었다. 애당심 함양이 기본이었지만 시민의식·정치적 식견·정신훈련 등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높이는데 힘을 쏟았다. 거기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국민의 정치교육이 따로 없던 때에 당원교육은 그들 뿐 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파급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다른 무엇보다 정치를 양성적인 것(positive·constructive)으로 인식되게 하였고 정치참여의 긍지를 갖게 했다. 당비를 내자는 운동에 힘을 넣은 결과 얼마 아니지만 당원의 60%가 당비를 내도록 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당원이 내는 당비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당원관리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터는 정당정치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사회의 발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조직관리·선거운동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것이다. 박대통령이 유신을 한 이유 가운데 선거망국론이 있었다. 돈을 안 쓰면 되지 않나, 하지만 낙선하고 정권을 잃는 판에 그럴 수 없는 것이다. 1987년부터 대통령직선을 다시 하니까 엄청 돈이 들어가는데 여당체질이었던 사람들은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선거 뒤 이렇게 돈을 써 가지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고 개탄했다. 2002년 대선 때의 ‘차떼기’ 해프닝을 보면 아무리 반성해 봐야 때가 되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10여 년 전, 은퇴하는 부산의 모 의원이 ‘돈 뿌린데서 표 나온다’고 말한 것이 신문의 톱을 장식했던 적이 있었다. 모두 아는 사실을 발설한 것 뿐인데... 그래서 돈이 덜 들어가는 선거를 해 보자는 것이 여·야간에 잡혔던 분위기요, 각오였다. 유신 때나 5공에서 1구2인제를 한 것은 여야 동반 당선케 해 정치싸움을 줄이고 선거비용을 줄이자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도 서로 1등 하려고 돈을 쓰기도 했지만. 또 득표수가 성적표로 나오는 것을 의식해서 당선이 보장된 곳에서도 어느 정도의 돈이 들어갔다. 필자가 제13대 때 지역구에 나갔는데 ‘교수가 무슨 돈이 있느냐’고 말하는 실수를 범했다. ‘돈 없는 자가 선거에 왜 나와!’란 핀잔을 받았던 것이다. 이래저래 돈 먹는 하마를 죽이자는 것이 결론. 다시 말하면 지구당을 해체하고 당원수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법이 바뀐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돈이 적게 들어갔을까? 당원이 있으면 평소에도 돈이 들어간다. 그러나 조직 관리를 잘하면 어느 정도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정당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물갈이가 성행하고 신인들은 신장개업과 홍보 그리고 고객 확보에 새삼 돈이 들어갔다. 거기다가 공천단계에서 막대한 자금수요가 있었다. 일언이 폐지하고 지금 정치와 선거에 돈이 들어가지 않고 깨끗한 선거를 하고 있는가? 국회의원과 지방자치에서 그 사이 입건되고 유죄 판결 받은 것이 몇 건인가? 온 사회가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판에 정치판만이 독야청청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 중앙당만 덜렁 정당의 하부조직과 당원을 없앤 결과 중앙당만 있는 모양으로 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했던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원이 없다 보니 ‘진성(眞性)당원’이란 희한한 말이 생겼다. 현행 정당법에 의하면 정당의 성립요건으로 5개 이상의 시·도당에 1천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면 창당 요건을 충족한다. 전국에 5,000명의 당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선지 현재 22개의 정당이 있고 창당준비과정에 있는 정당도 13개라고 한다. 중앙당의 기구표를 보면 지난날 많은 당원이 있을 때와 같은 거대한 조직체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머리만 큰 공룡 같은 중앙당은 당원의 당비가 아니라 국고보조, 기탁금, 후원회비로 운영된다. 요행히 국회의원 당선자가 한둘만 나와도 국고보조가 제법 짭짤하다. 국회의원은 각자 후원회가 있어 일 년에 수 천 만원에서 수 억 원의 회비를 걷는다. 불법헌금이나 뇌물성 헌금으로 들통 난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의원과 후원회는 분리된다. 한국의 실정은 ‘눈감고 아옹’하는 격이 아닌가. 정치자금이 공적으로 되고 투명해진 것은 좋다고 치자. 국회의원들의 각자도생이 가능해지니까 당의 리더십은 약해지고 고위당직도 일회로 끝난다. 리더십이 있어야 할 조직에 위계질서가 잡히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계급장’을 모두 떼 내버린 모양새다. 중국 공산당이 군대의 계급을 없앴다가 오래지 않아 원상회복을 한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대 국회는 물갈이를 많이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정치의 앞날이 염려된다. 다선일수록 탈락될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정치를 아마추어로 할 모양이다. 심지어 안철수 바람 뒤 20대를 영입 운운 하는데 이르러서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IT강국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필자 느낌으로는 그것 때문에 정치가 무너져서 국가가 위기에 부닥칠 것으로 본다. 민주주의란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펴는 시민이 있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에는 컴퓨터 뒤에 숨은 개인(homunculus)들이 할퀴고 헐뜯는 것을 ‘사회의 만남(social network)'이라고 하고 그들이 우루루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행패를 부리는 것을 직접민주주의인양 인식하고 있으니 그곳에 건전한 정치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고함을 여론으로 포장하고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니 이것이 바로 중우정치(衆愚政治)요, 폭도의 지배(mobocracy)가 아니겠는가! 공천이란 당의 이름이 걸린 행위다. 공천비리를 없앤다고 당 외 인사를 심사위원으로 모시고 공정성을 확보한다고 공직후보자를 공모하고 여론조사를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거의 모두가 비리와 부정의 틈새를 가지고 있다. 정당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당의 책임아래 공천자를 내 놓아야 한다. 정당조직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 지도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필자가 유학하던 60년대 초 독일에서는 대학에 각 정당의 조직이 있어 정치를 익히고 동지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야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가 생긴다. 그것을 요청하는 글들을 가끔 보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지도자(noble)가 없는데 거기서 무슨 책임이니 지조(志操)를 찾는가 싶다. * 어떻게 되나? 한나라당에 문의해 보니 지금도 당원은 200만이 있다고 한다. 민주통합당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정돈이 되면 다시 헤아리겠지. 그러나 밖에서 보기에는 과거와 같은 정당의 체계적인 중추·하부조직은 없어진 것 같다. 정당조직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거나 혹은 있더라도 유명무실하게 된 것과 선거의 투표율이 전반적으로 저조하게 된 것은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 근래 대선은 60%대, 총선은 40%대, 지방선거는 30%대로 떨어지고 교육감선거는 10% 중반 밖에 안 된다. 참정은 국민의 권리요, 의무다. 참정에 관심이 없게 되면 공공의 일에 등한하게 되고 결국 애국심도 없어지게 된다.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투표율이 60% 이하로 내려가면 정부와 권력의 정당성(legitimacy)이 훼손 된 것으로 본다. 민주주의, 민주정치가 조종을 울리게 되면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즉 무정부상태(anarchy)가 된다. 경제가 잘 될 턱이 없다. 사회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혼란스러울 것이다(anomie).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대로 민주정치가 썩으면 독재정치가 등장할 수 있다. 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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