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주요사업/활동
  • 연구활동

연구활동

정책세미나 - 성헌식 고구려역사저널 사무국장/편집국장
관리자 2014-02-10 263

정책 세미나 - 동북공정과 만리장성의 허구 (2014.2.7)

성 헌 식 (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고구려역사저널사무국장/편집인)

동북공정과 만리장성의 허구

가. 동북공정의 개요와 허구
 
* 이유 : 1911년 한족 땅이 소수민족의 1/2 뿐. 원래 중국사인 한족만의 역사가 중화족의 역사로 둔갑(요,금,원,청 + 고구려/발해).  정치적으로 억지로 통합시키려 함.
* 주 내용 : ①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이다
           ②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이다.
* 목적 : 북한에서 정변이 발생하면 무력개입하여 동북4성으로 만들려함. (북한 땅은 국제법상 국제분쟁지역) 역사적 연고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중국의 패권주의)
* 현상 : 분노만 느낄 뿐 대책 없음 (교과서의 내용이 같아 대항할 이론 없음)
  동북아역사재단은 오히려 협력, 정부는 무역과 외교문제로 수수방관,
  기업/국민은 무관심해 강 건너 불구경 (빼앗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버리고 있다)

1. 허구에 대한 비판
① 로마제국의 역사는 이태리의 역사다. (독일/프랑스의 역사 아님)
② 高句麗는 고구리(나라) : 중국의 고구려는 驪 <한서지리지> 유주의 현토군
③ 발해는 하남성 내륙호수 지명, 대조영의 나라는 대진(大震) : 지명이동
④ 고구리와 대진국은 자체연호를 쓴 천자국이다. (지방정권은 중국의 연호를 쓴다)

2. 한사군의 지명이동
* 한사군전쟁에서 한 무제가 참패했다. (조선오군이 한사군으로 변조)
* 우리 역사 낙랑국을 식민지 낙랑군으로 변조 (11살짜리 낙랑군)
*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 패수는 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 (청천강으로 이동)
* 백이·숙제 묘 이동(산서 서남단--> 하북성 노룡현)으로 요동·요서가 이동.
※ 덕흥리고분의 역사적 사실 (<한서지리지> 유주의 요동, 요서, 우북평, 상곡, 어양,     낙랑, 현토, 발해, 탁, 대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

나. 진시황 만리장성의 허구

  2012년 6월 중국은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는 만주를 관통하였고, 서쪽으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까지 이르는 것으로 발표했다. 중국의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만리장성 주장에 대해 국내 역사학계는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그 이유는 이를 반박할 주류학계의 자료와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도 학계에서 입을 다물자 아무런 다음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마찰 및 외교문제가 우려된다는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풍지대를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와도 같다. 힘을 앞세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도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주류사학계의 그릇된 역사왜곡 때문이다. 고무줄 만리장성이 발표되자 몇몇 인사들만이 중국대사관 앞에 모여 항의하는 해프닝이 전부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
  중국의 억지 주장은 과연 역사적으로 맞는 주장일까? 진시황이 쌓은 실제 장성의 위치와 모습을 추적해 봄으로써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이론인가에 대해 논하겠다. 진시황의 연혁은 아래와 같다.
* B.C 247년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31대 왕으로 13세에 즉위하였고,
* B.C 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39세에 황제가 되었으며,
* B.C 210년 37년간 재위(11년간 황제) 후 49세에 사망하였다.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장성을 쌓기 시작한 때는 통일 후인 진시황 34년(B.C214) 불로초를 구하려고 떠났던 연나라 사람 노생이 돌아와 <록도서(?圖書)>란 책을 바치며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호(胡)입니다”라고 아뢰자, 진시황은 이 호를 북쪽 흉노로 알고 장성 보강을 명령한다.

  이에 B.C 214년 몽념장군이 30만 병력으로 북쪽 오랑캐를 쳐서 하남의 땅을 취했다. B.C 210년 진시황이 49세의 나이로 죽자 차남 호해(胡亥)가 형을 죽이고 황제로 등극하여 장성축조가 중단된다. B.C 214년부터 쌓기 시작한 진장성이 4년 만에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만 리라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亡秦者胡也의 胡는 흉노가 아니라 바로 진시황의 차남 호해였다.) 

  중국 자료에 의하면 진시황은 새로운 장성을 축조한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제·조(齊趙)나라 장성을 수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나라 장성에 대해서는 <사기 흉노전>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격파하니 동호가 천 여리를 물러났다. 연나라가 장성을 쌓으니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을 동호로부터 지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모두 유주(幽州)에 속한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장성의 서쪽 조양은 상곡군의 치소였으며, 동쪽 양평은 유주의 요동군에 속한 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쌓은 연장성은 산서성 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진시황이 쌓았다는 장성도 그 일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어디인가?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장성축조에 대해 “33년(B.C214) 장군 몽념으로 하여금 30만 병력을 일으켜 북쪽 오랑캐를 쳐서 하남의 땅을 빼앗아 취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위치나 길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사기 몽염열전>에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 장군과 30만 명으로 하여금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 여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하남(河南)은 황하의 남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을 의미한다.    
                                          
(1) 진장성의 서단 임조는 어디일까?
  위 기록에서의 진장성의 서쪽 끝인 임조현에 대한 역사연혁은 “적도: 진나라 때 적도현을 설치해 롱서군의 치소로 했다. 서진 말기에 적도군의 치소로 했다. 당나라 때는 적도군 임주, 송나라 때는 희주, 균이 적도군 치소였다. 청나라 건륭제 때 주를 바꿨다. 민국 초기에 적도현으로 했고, 후에 임조로 바꿨다. 적도라고 한 이유는 이 땅에 적인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1929년 적도현을 임조현으로 바꿨는데, 그 땅의 임조하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즉 롱서군 = 적도군(현) = 임조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 장성의 서쪽 끝인 임조=적도=롱서(?西)는 과연 어디일까?
<사기 백이열전>에 후대 학자들이 붙인 아래 설명에 롱서가 언급된다. 
  1) <사기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기록에 전하길,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2) <사기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고 했으며,
  3) 또 백이의 노래에서 전하길 “그들은 서산에 올랐는데, 서산은 롱서와 가까운 곳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위 세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바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끝인 롱서(=임조=적조)인 것이다. <사기집해>에서 말한 것처럼 <대청광여도> 등 고지도에 산서성 서남단 황하굴곡지점에 뇌수산(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무덤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2008년 그곳에서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2) 진장성의 동단은 맹강녀곡장성
  <사기 몽염열전>에 기록된 진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이다.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중국 4대 민화 중의 하나인 맹강녀(孟姜女)의 설화가 있는 황하북부 하남성 위휘현 일대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맹강녀하’라는 하천이 있으며, 맹강녀 관련 길과 다리 등 시설물이 있다. 참고로 위휘현은 저 유명한 강태공의 고향이자 그가 다스리던 제나라가 있던 곳이며 제나라 장성이 지나는 곳이다.

  (맹강녀 설화의 내용) 맹강녀가 결혼하여 첫날밤을 지내던 중 난데없이 병사들이 들어와 남편을 장성 축조장으로 끌고 간다.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궁금하고 불안해진 맹강녀는 장성 축조장으로 남편을 직접 찾아간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장성 안쪽에서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진시황이 그녀의 통곡소리를 듣게 되고 그곳에 왔다가 맹강녀를 보고 미모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되고 맹강녀는 진시황에게 탈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탈상이 끝나자 맹강녀는 높은 바위에 올라가 진시황의 폭정을 성토하고는 떨어져 죽는다. 이후 맹강녀는 절개를 지킨 열녀(烈女)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는 민화이다.
 
  그 장성이 바로 진장성의 동쪽 끝인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이라 하며 그곳이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중국 백과사전>의 자료를 보면 “맹강녀가 위휘지 산단장성까지 남편을 찾아가자 천지가 감동해 장성이 무너져 장부의 시신이 노출되자 통곡했다. 지금의 위휘지 산향왜뇌촌 일대에서 아직도 전해지는 고사이다. 산 위에 가면 맹강녀가 곡을 하고 장성이 무너진 누적석을 볼 수 있다. 신향시구에는 맹강녀하와 맹강녀길와 맹강녀다리 등의 명칭이 있다”
 
  중국정부는 원래 하남성 위휘현에 있는 맹강녀 관련 유적을 하북성 동단 진황도시에 만들어놓고 그곳의 장성이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이라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고향이 섬서성 중부 황룡촌인 맹강녀가 하남성 위휘현에 살던 범호랑(신랑)에게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 신랑이 집에서 끌려가 하북성 동쪽 산해관에 있는 장성축조에 동원되었고, 그곳까지 여자 혼자서 찾아갔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지?

  지금까지 중국역사 최고의 자부심으로 치부되던 만리장성 즉 동쪽 산해관에서 시작되어 북경 북쪽을 지나 서쪽 감숙성 지위관까지 가는 장성은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아님이 명백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성을 누가 언제 쌓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산해관 현판의 방향과 각산장성의 봉화대 위치, 치양식, 화살구 방향 등으로 볼 때 서쪽에 있는 한족을 방어하기 위해 동이족이 쌓은 장성임이 확실하다. 필자는 북경~산해관장성이 고려 때 쌓은 천리장성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즉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산서성 서남단 황하변에 있는 수양산에서 시작되어 고대의 갈석산인 현 중조산의 북쪽 기슭을 따라 축성되었으며, 동쪽으로 북부 하남성 위휘시까지 이어가는 길이 약 천리의 장성으로 당시 중국과 우리와의 국경선이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 북쪽 산서성은 고구리의 전신인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이 통치하던 강역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