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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문제연구특위강연회 -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교수
관리자 2013-11-04 289

헌정회 영토문제연구특위 강연회/ 대마도에 대한 연구(2013.11.4)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한국과 일본의 대마도인식



Ⅰ. 머리말
Ⅱ. 고ㆍ중세의 대마도인식
  1. 고대의 대마도 인식
  2. 중세의 대마도 인식
III. 조선전기의 대마도인식
  1. 조선 초기의 대마도 관계
  2. 대마도정벌과 속주화 문제
  3. 조선 전기의 대마도인식과 특성
IV. 조선 후기의 대마도 인식
  1. 통교관계의 변화
  2. 조선 후기의 대마도 인식과 특성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국경의 도시, 대마도에 잘 오셨습니다.”
대마도 비행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현수막이다. 공항뿐 아니라 선착장, 시내 어디에도 쉽게 볼 수 있는 이 구호는 일본인관광객에게 이국적인 느낌을 호소하는 광고문이다. 대마도는 일본의 서쪽 끝에 있는 섬이며,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의 국경을 마주하는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9km, 일본의 규슈지역의 제일 가까운 지역까지는 147km이다. 일본보다 한반도와의 거리가 3배 정도 더 가까운 셈이다. 자연의 형세가 이러한 만큼 대마도와 한반도와의 교류는 원시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밀접하였다.
한국인에게 대마도라고 하면, 독도와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 우리측에서는 그럼 대마도는 한국땅이라는 맞불을 지르자는 주장이 인터넷상에 오른다. 혹은 세종대에 대마도정벌을 했을 때 그대로 눌러앉았으면 지금쯤 대마도가 우리 영토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홧김에 나오는 ‘투정’에 지나지 않을까?   
사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일본에 대해 반환할 것을 요구해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를 받아 국회에서는 대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촉구하는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일본의 요시다(吉田茂)내각은 펄쩍 뛰면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맥아더장군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맥아더사령부 측도 이 대통령의 발언이 2차대전 후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구도를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이대통령은 대마도 영유권 주장과 반환요구를 외교채널을 통해 정식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사절을 만날 때 이따금 대마도 영유권을 역설했다 한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러한 발언을 하였을까?
이대통령의 발언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를 기저에 깔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당연히 한국인의 전통적인 대마도관이 개재되었다.
오늘 발제에서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양국의 대마도인식을 고찰하겠지만, 고대와 중세의 대마도인식과 함께 개항기까지의 시간적 변화양상을 정리해볼 것이다. 또 조선시대 대마도인식에서 핵심적 주제인 屬州化 조치와 兩屬關係論에 관해서도 양국의 연구자들의 이론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Ⅱ. 고ㆍ중세의 대마도 인식

1. 고대의 대마도 인식
기록상으로 대마도가 나오는 최초의 史書는 3세기 초반 중국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 倭人條이다. 여기에는 “狗邪韓國에서 一海를 건너 對馬國에 이른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마도는 이름이 ‘對馬國’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가야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사서에서는 대마도를 어떻게 기술하였을까? 우선 그 명칭에 대해 『三國史記』에는 ‘대마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의 『日本書紀』에는 ‘對馬國’,  ‘對馬島’,  ‘對馬洲’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보아 한자의 음을 빌린 ‘對馬’란 이름이 중국의 『三國志』 이래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 같다. 『古事記』에는 ‘津島’로 나와 있고, 『일본서기』 ?神代?에는 ‘韓鄕之島’란 표현도 나온다. 이것은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韓鄕之島)’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 온 섬’, 혹은 ‘한국섬’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후자는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더 강하게 표현된 것이지만 요컨대 대마도가 한반도와 일본의 사이에 있으면서 교량적 역할을 한 섬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일본에서는 일본 최초의 쌀농사 재배유적지가 남아 있는 등 한반도과 규슈(九州)의 교량적 역할을 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시기 대마도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만들어진 금속기, 玉器, 토기 등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대마도는 일본열도의 문화와 공통적인 요소도 있으면서도 한반도와의 활발한 인적 왕래와 이동을 배경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 한국의 대마도 인식
대 한반도와 대마도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나타내주는 사료는 매우 적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박혁거세 조에, “瓠公이란 사람은 그 族姓이 미상인데 본래 왜인이다. 처음에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으로 호공이라고 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또 같은 책 신라본기 실성왕 조에는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營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병을 뽑아 격파하자고 하였다.” 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신라와 대마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이 기사에 대해 조선 후기에 편찬된 『增補東國文獻備考』에서는 “호공이 대마도인으로서 신라에 벼슬하였으니, 당시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어느 시기에 저들의 땅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논평하였다. 또 후자에 대해서는 “만약 본래부터 대마도가 왜인의 땅에 속하였다면 그곳에 營을 설치한 것을 신라의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여 사료분석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다소 막연하고 유보적이지만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연고권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일본 고대의 사서인 『古事記』와 『日本書紀』에는 대마도의 호족을 ‘對馬縣直’으로 임명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대마도는 고대부터 왜와 일본의 지배가 미치는 지역으로 정치적으로 실효적 지배를 하였다는 인식을 나타내었다.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에서는 663년 백촌강전투 이후 한반도와의 경계를 의식하는 개념이 강화되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665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해 筑紫에 大野城을 쌓았고, 667년에는 대마도에 백제식 산성인 金田城을 축조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율령제 하에서 대마도는 一岐島ㆍ陸奧ㆍ出羽ㆍ佐渡 등과 함께 ‘변방의 요처(邊要)’로 자리매김당하였다. 이에 따라 대마도는 ‘國’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7세기 중엽에 國司를 파견하였고, 서부지역의 국방과 외교를 담당하는 大宰府의 관할 하에 두었다. 한반도와 중국에 접한 국방상의 요충지이자 교류의 최선단기지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이전부터의 대마도의 在地 세력인 國造는 율령제 하에서 郡司로 바뀌었다. 율령시대 후기에 國司제도가 변질됨에 따라 토착세력과 연결된 在廳官人이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재지세력은 卜部氏, 그 뒤에는 阿比留氏로 이어졌다. 
한국 측의 기록에 비해 일본 사서의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고 자세함을 알 수 있다.

2. 중세의 대마도 인식
1) 고려시대의 교류와 대마도 인식
8세기말 통일신라와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이래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양국의 관계는 정상화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양국 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중앙정부 사이의 사절왕래는 없었지만 상인들의 교역과 표류민 송환과 같은 민간교류는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고려 중기 문종대(1047-1082)에 들어서 활발해졌는데, 특히 대마도에 의한 표류민 송환과 토산물 진헌이 가장 많았다.  문종대 이래 대마도와 일본 서국지역의 호족들을 통한 교역이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進奉船貿易으로 정례화되었다. 1169년부터 1266년까지 100여 년 동안 실시된 진봉선무역은 進奉과 回賜로 이루어지는 조공무역으로서 ‘進奉禮制’로 표현되듯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일시적인 私獻貿易이 아니라 외교의례의 형식을 갖춘 공식적이고 정례적인 교역체제였다. 또 진봉의 주체는 대마도이고 大宰府가 그것을 관리 감독하고 막부는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이 진봉선을 접대하기 위해 金州(김해)에 객관을 설치하였으며, 외교문서의 수수관계는 고려의 금주방어사 - 대마도주, 경상도안찰사 - 大宰府의 루트를 취하였다.
그런데 진봉선무역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약정된 무역선 외에 허가받지 않은 사무역선이 무질서하게 내왕하고 또 일부는 해적행위도 함으로써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元의 침략 이후 고려가 원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여원연합군의 일본침공이 시작되면서 진봉선무역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고려와의 교역통로를 상실한 대마도인은 왜구로 변하였다.
그러면 고려시대의 대마도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 이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시사를 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星主를 ‘耽羅勾當使’로, 一岐島主를 ‘一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지역 내지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것을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쓴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위 세 섬을 고려의 屬領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중기 이래 진봉선 무역체제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 체제에서의 고려와 대마도는 조공관계였다. 이어 고려 말 공민왕대에는 대마도주가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받았다. 양국 간에 국교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가 진봉선무역이라는 형태로 고려와 통교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도주가 고려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대마도의 반독립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려는 대마도를 속령 내지 속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편 고려 중기 이후의 고려와 대마도 관계를 보면 조선 초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진봉선은 조선초기 대마도주에게 허락한 歲遣船과 같은 성격이며 진봉선의 접대를 위해 금주에 설치한 객관도 조선 초기의 倭館과 마찬가지다. 이로써 보면 조선 초기 대마도 관계의 원형이 이미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식 면에서도 후술하는바 조선 초기의 對馬故土意識과 屬州意識이 고려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원형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이 시기 일본의 대마도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일본의 사서에는 대부분 중세에도 대마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가 이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측의 사서 가운데 대마도와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기록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대마도의 역사를 기록한 『對州編年略』의 범례에, “山家要略記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牧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開化天皇 대에 이 섬(대마도)에서 (일본본주로) 습래해 왔다. 仲哀天皇이 豊浦宮에서 대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라고 한 기사가 나온다. 고대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편찬된 『塵袋』 권2에는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대마도가 옛날에는 신라와 같은 곳으로서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질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III. 조선전기의 대마도인식

1. 조선 초기의 대마도 관계
조선 초기 대일정책의 기본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으로서 바로 왜구대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1419년(세종 1)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한편 이 시기 대마도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 조정의 적극적인 왜구대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왜구는 통교자로 전환되었다. 대마도의 왜구수령이었던 早田左衛門太郞도 조선왕조에 귀속해 수도서인이 되고 교역자로 바뀌었다. 무로마치시대 초기 대마도 내에 기반을 확립한 인물은 經茂의 손자인 宗貞茂와 아들 宗貞盛이다. 사다시게(貞茂; 재위 1402-1418)는 라이벌인 仁位宗氏 세력을 타도하고 정식으로 對馬守護가 되었다. 15세기 초반 7대 도주 사다시게 때부터 대마도에 정착하였으며 조선 조정의 왜구 금압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82회에 걸쳐 조선과 통교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가신과 도민을 통제하고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아들 사다모리는 1436년(세종 18) 조선과 文引制度 정약, 1441년 고초도조어금약 체결, 1443년 癸亥約條 체결 등으로 대조선 통교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宗氏는 도항증명서인 문인의 발행권을 비롯한 조선과의 통교권을 장악함으로써 도내의 지배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다모리 대에 對馬國이라는 宗氏領國體制를 확립하였다.

2. 대마도 정벌과 속주화 문제

1) 대마도 정벌

조선 초기의 적극적인 왜구대책으로 왜구가 격감하였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의 본거지로 대마도를 가장 주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 朴?의 토벌 이래 태조대에도 대마도 정벌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잔존한 왜구들에 대한 최후의 군사적 대응이 1419년(세종 1)의 대마도 정벌이었다. 조선에서는 ‘己亥東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조선 초기 조일관계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1419년 6월 19일 조선 조정은 三軍都體察使 李從茂 이하 병력 17,000여 명을 병선 227척에 싣고 거제도를 출발해 대마도를 향하였다. 이들은 20일 대마도의 淺茅灣을 공격하여 적선 130여 척을 나포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豆知浦에 정박하였다.
己亥東征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쌍방 간에 3,8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은 왜구의 섬멸이라는 당초목표를 완전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왜구의 본거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대마도 정벌의 의의로는 왜구의 근절과 함께 통교체제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기해동정이후 왜구가 복속하였다”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옴으로써 세종대의 각종 통교제한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는 왜구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 ‘兩屬關係’로서 일종의 중립화정책을 취하였다.

2) 대마도 속주화 문제

사료 ① “대마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하였다.”

사료 ② “대마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鷄林에 예속되었던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  만약 빨리 깨닫고 다 휩쓸어와 항복하면 도주에게는 좋은 벼슬과 두터운 몫을 나누어줄 것이요, 나머지 代官들은 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리들도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할 것이다. ……  이 계책에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하다.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나라에 항복하지도 않으면서 도적질할 마음으로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갖추어 다시 섬을 에워싸 정벌할 것이다.”

사료 ③“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州郡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켜 시키는대로 따르겠습니다.”

사료 ④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해 보고토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낸다.”

사료 ①은 출정 전인 6월 9일 태종이 반포한 敎書이다.  대마도가 조선령이라는 이 주장이 현존하는 문서상으로는 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제작된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도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로 보아 태조대 박위의 대마도정벌 이후에 이미 이런 인식이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사료 ②는 대마도정벌 후 7월 17일 병조판서 趙末生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보낸 諭書이다. 再征의 논의가 수그러지면서 조선 조정은 이 유서를 보내 항복(捲土來降)을 하든지 아니면 일본 본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대해 도주는 9월 25일 항복을 청함과 동시에 印信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대마도를 완전히 비우라는 조선정부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료 ③은 조선 조정의 유서에 대한 대마도주 사다모리의 답서로서 조선의 藩屛을 자임하면서 屬州化를 요청하였다. 즉 대마도주는 이듬해인 1420년 윤정월 10일 사자 時應界都(辛戒道)를 조선에 보내 대마도민을 거제도에 이주시키고, 조선 국내 州ㆍ郡의 예에 따라 對馬州라는 이름을 정하고, 조선에서 ‘印信’을 하사해달라는 등의 청원을 하였다.
사료 ④는 예조판서가 대마도주에게 보낸 서계로 대마도 속주화 조치와 도주에 印信을 하사하는 내용이다. 1420년 윤정월 23일 조정에서는 대마도주의 요청에 따라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하는 屬州로 하고 印信(圖書)을 사다모리에게 주었다. 또 이후에 대마도주는 직접 예조에 서계를 보내지 말고 경상도관찰사를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였다. 또 도주 이외의 사절의 경우 반드시 도주의 인신이 찍힌 것만 사절로 접대하겠다고 하였다.
대마도 정벌 이후 반년에 걸친 교섭결과 이듬해 정월 ① 대마도는 조선의 屬州로서 경상도의 관할 하에 두며 경상관찰사를 통해 서계를 올릴 것, ② 요청한 印信을 하사하되, ③ 앞으로 대마도로부터 오는 사절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참할 것 등으로 결말지어졌다.   이로써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되고 도주는 조선의 受圖書人이 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의 경상도 속주화 문제는 조일 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선정부와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간에 일시적인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대마도 정벌의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에서는 조선과 明이 연합하여 일본을 침공한다는 流言이 나도는 등 긴장하였고, 조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하였다. 대마도와의 사이에 전후처리 교섭이 진행되던 1419년 11월 4대 將軍 足利義持가 보낸 使僧 梁倪와 九州探提의 사절이 조정에 도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大藏經을 求請하는 것이었지만 대마도 정벌의 진상과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려는 목적에서 파견된 사절이었다. 이에 세종은 막부가 요청한 대장경을 回賜함과 동시에 宋希璟을 回禮使로 보내었다.
회례사 송희경이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早田左衛門太郞이 속주화 결정에 항의하자, “그것은 그대들의 요청에 응한 것일 뿐 조선이 영토적 야심이 있어서 예속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송희경은 또 막부장군에게도 대마도 정벌이 왜구 금압을 위한 것이었을 뿐 일본 本州를 침략할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조선 조정은 무로마치막부의 견제와 대마도주 및 호족들의 저항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키는 대신 도주가 신하가 되어 변경을 지킨다는 명분과 정치적 종속관계에 만족하였다. 대마도의 속주화는 이제까지 일본의 경계영역에 속하던 대마도가 조선의 경계영역으로 바뀌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대한 屬州化나 內國化 조치를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았다. 원래 조선의 대마도 정벌의 목적은 왜구의 진압이었고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로서는 이것으로써 대마도가 조선의 藩屛으로 속령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3) 대마도 양속관계론
조선 초기 정부에서는 대마도에 대해 이념적‘王領’의 일부로 간주하였지만 영토적 소유권이나 실효적 지배를 도모하지는 않았다. 1419년 대마도정벌을 전후해 일시적으로 그러한 시도를 하였지만, 세종은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대마도주를 남쪽 변경의 평화를 지키는 ‘藩屛’으로 삼았다.
대마도주 宗氏는 일본으로서는 對馬守護로서 대마국이라는 토지의 영유가 인정되었다. 조선에게는 수도서인으로서 조선의 外臣이며, 대마도와 경상도 남방에 이르는 해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조선에서는 정부의 대행자로서 통교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문인발행권을 도주에게 부여하였다. 대마도주는 형식상의 수직인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 국가기구의 말단에 위치해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의 대마도 정책은 기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마도주에게 도서를 주고, 동시에 조선의 직책을 주어 변방의 평화적 관리를 맡기는 방식이다. 대마도주는 受圖書人이면서 受職倭人인 셈이다. 세조대에 대마도주 宗成職에게‘崇政大夫 判中樞院事 對馬州兵馬節度使’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다. 대마도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을 敬差官으로 명명했다는 것은 대마도를 조선의 관할이 미치는 장소로 인식하였으며, ‘異國’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대마도주는 무로마치막부와 조선왕조의 양쪽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른바 兩屬關係이다.
양속관계론에 대해 일본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 대마도의 처지에 대해  黑田智는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에 양속해 있으면서, 때에 따라 접근하고 이반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양속관계를 인정하였다. 대마도주로서는 무로마치막부와 조선 조정 양쪽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고하게 하는 것이며, 양국 정부의 권위가 도내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한편 關周一는 양속관계라 하더라도 등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對馬守護로서 무로마치막부와의 관계가 기본이고, 그 전제 위에 조선의 수도서인으로서 정치적 복속을 하면서 왜구의 진압, 경상도 남해안과 대한해협의 안전 확보, 일본측 통교사절의 통제 등의  임무를 위임받아 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해석이 사실과 동떨어지는 주장일 가능성이 있다. 몽골의 대마도 침입 때 일본의 조정과 가마쿠라(鎌倉)막부는 대응하지 않았으며, 博多 방어에 집중하였다. 이것은 대마도를 경계영역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일본의 ‘內’는 西國, 東國, 九州만 포함되었으며, 대마도를 비롯한 一岐島, 松浦 등지의 섬은 ‘外’(異國)의 중간지대로서 경계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시대 대마도, 일기도 등의 경계영역에 거주하던 영주들이 고려와의 교역을 주도하였다. 진봉선무역의 경우에도 당시 일본이 고려와 정식 국교가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대마도는 독자적으로 고려와 정기적인 무역을 행하였다. 이 점에서도 대마도의 반독립성이 드러난다. 무로마치막부 시대에도 대마도는 반독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 시기 대마도는 막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 조선과의 무역에서도 막부와는 별도의 채널로 하였으며, 조선에서 막부로 파견한 사절을 護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대일외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대마도를 본주와 구별하는 시각이 많았는데 임진왜란 시 豊臣秀吉의 부하가 그린 ?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점도 일본인의 대마도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흔히 양속관계라고 하지만 조선전기의 경우 대마도는 무로마치막부보다는 조선정부와 더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3. 조선전기의 대마도 인식과 특성

1) 한국의 대마도 인식
대마도 정벌과 속주화 조치 이후로 대마도를 조선의 속주로 간주하는 대마속주의식은 조선 전기에 면면히 계승되었다. 대마도정벌 이듬해 일본에 회례사로 다녀온 송희경은 대마도를 附庸國 내지 屬國으로 인식하였다. 대마도에 도착한 후 그는 ‘조선과 일본은 한 집안’이라고 하였고, 대마도만호 左衛門太郞을 만나서는‘같은 왕의 신하’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경상도속주화 조치가 취해진 상황 하에서 대마속국관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마도정벌 후 조정에서 일반화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金誠一은 대마도주에게 보낸 글에서“貴島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며, 족하는 동으로 貴國을 섬기고 북으로는 우리 조정에 순종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의 공경함이 지극하였다.” 라고 하였다. 즉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국을 다 섬겨온 사실을 말하면서 양속관계임을 분명히 밝혔다.
1486년(성종 17) 왕명으로 편찬된  조선 전기의 지리서인 『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일본의 대마주이다.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대마도가 일본국의 대마주라고 밝혔지만 이어 옛날 우리의 고토였다고 하고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현실적인 ‘관할조선’과 이념적인 ‘왕령조선’을 절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이 내용은 조선시대 대마인식의 기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후 지리지와 외교자료집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 명종대 濟用監에서 제작한 ?朝鮮方域之圖?에는 만주와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어 이 시기의 영토의식 내지 대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471년 신숙주가 편찬한 『海東諸國記』에서는 日本國紀 안의 한 항목으로 ‘대마도’를 기술하였다. 또 대마도지도에서도 ‘日本國對馬島之圖’라고 표기하여 대마도가 일본국 소속임을 명기하였다. 영토적 소속이‘일본’임을 명시함으로써 대마속주의식에서 번병의식으로 바뀌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대마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대마도 인식의 유형을 정리해 보면, ① 대마도가 옛날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對馬故土意識 ②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라고 하는 對馬藩屛意識 ③ 대마도가 일본 본주와는 다르다고 하는 대마구분의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마고토의식은 태종과 세종의 교서 이래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문적에 분명하다고 하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약간 불확실하다.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가 일시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되기도 하였고, 대마도 정벌을 감행한 태종이나 중종대 삼포왜란을 진압한 黃衡과 같이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땅이었으므로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 후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동제국기』나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도 대마도가 현실적으로 일본땅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서술된 것이었다. 따라서 대마고토의식은 세종대 중기 이후로는 관념적인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대마번병의식이다. 대마고토의식이 다소 관념적인 데 비해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조선시대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졌던 대마도관이었다.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에 대한 영토적 지배 대신 정치적 속령화정책으로 바꾸게 됨으로써 대마도는 일본의 소속으로 되돌아갔지만 정치적으로 조선에 종속되었다. 대마도주는 수도서인이 되어 조공무역을 하였으며 歲賜米豆를 하사받았고, 도내의 호족들은 수직왜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대마도에게 경제적 특혜를 주는 대신 조선의 울타리로서 왜구를 진압하고 통교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남변의 평화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외이통제책으로서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조선의 東藩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마도의 교역선에 대해 모두 조공적 의례를 갖추도록 하였다. 또 대마도에 파견한 사신의 명칭도 敬差官ㆍ體察使ㆍ招撫官 등 국내의 지방관의 직명을 사용하였던 점도 대마도를 속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대마도가 영토적으로는 일본에 속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국가질서 속에 의제적으로 편입되어 신하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를 양속관계라고 한다.
셋째, 대마구분의식이다. 이것은 양속관계론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인들은 대마도를 일본 본주와 구별되는 반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많이 있다. 예컨대 대마도정벌 시 조선정부는 해적단의 본거지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일본 막부로부터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것이 본주에 대한 침략이 아님을 九州探題에게 미리 통보하였다. 1444년(세종 26) 一岐島招撫官 姜勸善의 보고에서도 대마도에 대해 ‘일본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였다. 『해동제국기』에도 대마도를 일본의 8도 66주와는 별도로 기술하였다.

2) 일본의 대마도 인식
   조선의 대마번병의식에 대해 대마도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이 스스로 조선의 藩籬 혹은 藩屛으로 자칭하는 기사와 서계를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에서 스스로 조선의 번리나 번병으로 자칭하면서 외방의 신하(外臣)로서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례는 흔하다. 1464년(세조 10) 宗成職이 보낸 서계에서 “저는 朝鮮이라는 大國에 대해 藩籬입니다”, 1474년(성종 5) 宗貞國이 보낸 서계에서 “대마주는 귀국의 신하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1487년(성종 18) 보낸 서계에서도 “영원토록 귀국의 번병의 신하로 칭하며 충절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東藩이라고 자임하였다.
경차관의 파견도 대마도가 조선의 번병이라는 인식 하에 실시된 것이다. 경차관의 파견은 대마번병의식을 실제 대외정책에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조선 중심의 명분론적 대외인식이 깔려 있다.  대마도에서도 조선-대마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경차관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수용하였다.
한편 일본측의 사료에서도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歲遣을 약속한 것은 실로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일시적인 구급책에 불과합니다. …… 그리하여 잘못된 선례가 생기게 되어 조선에 대해 藩臣의 예를 취하여 수백 년 동안 그 나라로부터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明治維新 이후 외교개혁 과정에서 대마도 측이 메이지정부에 올린 奉答書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대마도는 대조선 관계가 번신의 예로서 굴욕이었다고 하였다. 이어 1868년 메이지정부로부터 국서 전달을 지시받았을 때에는 “지금의 서계부터는 조선이 주조해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그들(조선)이 번신으로 우리를 대해온 오류를 바로잡아, 옛부터의 國辱을 씻고 오로지 國體와 國威를 세우고자 한다.”고 하면서 각오를 밝혔다. 이로써 대마도는 조선시대 조선 정부가 대마도에 취한 세견선과 수도서제가 조공의례에 바탕을 둔 것이며 또 대마도가 조선의 번속국이었음을 자인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V. 조선 후기의 대마도 인식

1. 통교관계의 변화

무로마치막부 시기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며 조선과의 독자적인 통교를 하였던 대마도는 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예속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어 도쿠가와(德川)막부시대에도 초기에는 조선외교를 전담하면서 독자적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17세기 초반 幕藩體制에 편입되어 도주 宗義智는 막부로부터 從四位下侍從 對馬守로 임명받았다. 물론 이 시기에도 대마도가 조선외교를 특수임무(家役)로 맡아 전담한 것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이다. 대마도주는 여전히 조선의 수도서인으로 세견선, 세사미두의 지원과 왜관무역을 통한 이익으로 재정을 유지하였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조ㆍ일 양국 사이에서 양속관계라는 큰 테두리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조선 후기의 조일통교체제는 전기와 같은 다원적 형태가 청산되고 막부 - 대마도로 일원화되었다. 전기와 같이 여타 호족세력들의 통교가 없어짐으로써 대마도의 조선외교 독점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지만 막부의 감독을 받음으로써 독자성은 줄어들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비해 대마도의 일본 예속화가 진전되었고, 그만큼 양속관계는 약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변화로 인해 대마도가 형태적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막부 쪽으로 기우는 것이었다.
 
2. 조선후기의 대마도 인식과 특성

첫째, 조일관계와 대마도의 지위가 내용적으로 바뀌어 감에도 불구하고 대마고토의식과 동번의식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실과는 반대로 더 관념화되면서 심화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지도에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18세기 이후의 지도에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1740년 鄭尙驥의 「東國地圖」에는 대마도에 ‘日本界)’라고 표기하여 일본의 영역에 속하고 있음을 밝혔다. 현실에 기초한 대마도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로 이러한 경향이 일반화된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輿地圖」, 1790년에 제작한 「八道地圖」등이 그러한 예이다.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갈수록 지도에서 대마도를 ‘일본계’라고 표시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갔으며, 대마도를 일본과의 경계로 보았다. 개화기에는 지도의 정확성이 높아졌고, 대마도가 일본 소속이며, 일본영토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표시된다. 예컨대 1899년에 제작된 「大韓全圖」와 1908년의 「大韓帝國地圖」가 그러한 예이다. 
둘째, 대마구분의식의 심화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본주와 대마도를 구분하는 의식은 조선 전기부터 있어왔지만 그것을 ‘深處倭’와 ‘對馬倭’의 용어로 구분한 것은 임진왜란시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姜沆의 『看羊錄』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대마구분의식이 전기보다 명확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후 안정복이 『東史外傳』에서 대마도를 ?附庸傳?으로 별도로 설정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표현이다.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행의 서기 元重擧는 “대마도는 내국인과는 전혀 다르다. 내국인들이 항상 대마도를 오랑캐라고 부르며 사람 축에 같이 끼워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마번병의식과 대마구분의식의 심화는 대마도의 달라진 위상과 태도에 대해 기존의 관념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본론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대마도 인식을 대마고토의식, 대마번병의식, 대마구분의식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와서 체계화되지만 고대로부터의 역사적인 유래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특히 조선 전기의 대마도인식은 고려시대 중기 진봉선무역체제 하에서의 조공적 관계와 고려 말 대마도주의 ‘수직왜인화’등을 통해 생긴 것으로 추정하였다. 여기에 대마도 정벌 후 일시적이나마 대마도가 경상도의 속주로 들어왔다는 사실, 또 대일통교체제상 대마도가 조선의 국제질서 속에서 藩臣으로 의제되면서 편입되었던 사실 등에 의해 이러한 대마도 인식은 체계화되었다. 조선정부는 대마도에게 대일외교의 창구를 맡기는 대신 수도서제와 수직왜인제를 실시하였고,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지원해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전형적인 외이기미책의 형태이다. 이에 따라 조선은 대마도가 비록 영토적으로 일본에 소속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번속국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대마도 인식은 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왕정복고와 외교일원화 조치에 따라 대마도가 사실상 해체당함으로써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 의미를 잃어갔다. 근대에 들어와 특히 일본의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일변하였다. 1854년 미일수호조약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도쿠가와막부는 종래 대마도에 의해 대행되고 있었던 조선외교와 무역을 직접 관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 속에 이 조치는 결행되지 못하고 메이지정부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1868년 明治維新 후 성립된 신정부는 당연히 외교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869년 版籍奉還이 이루어져 ‘對馬藩’은 ‘嚴原藩’으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대마도주의 조선외교권은 신정부에 강제적으로 접수당하였고, 이 해 9월 외무성 관리가 대마도로 파견되었다. 이어 1871년 廢藩置縣에 의해 대마도는 나가사키현(長崎縣) 부속의 일개 지방행정단위로 편성되었다. 또 메이지정부의 외교일원화 조치에 의해 대마도의 특수임무(家役)인 조선외교에 관한 제업무도 1872년 모두 외무성으로 옮겨졌다. 이어 부산왜관이 접수되었으며 수도서제와 세견선이 폐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의해 조선시대 조ㆍ일간의 전통적인 교린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조선정부는 대마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대마번병의식은 현실감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는 대마도와 일본 본주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대마도와의 별다른 관계 설정도 없었다. 당연히 대마번병의식을 나타내는 기록도 급격히 사라져갔다. 1908년(순종 2)에 편찬된 『증보동국문헌비고』를 보면, 대마도에 대해 “지금 비록 일본 땅이 되었으나 본래 우리나라지방에 속했던 까닭에 우리나라의 故事가 많으므로 아울러 기록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대마도 영유에 대한 문제에서 차분하고 공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대마고토의식, 조선과의 문화동질성, 일본 내 대마도의 이질성, 경상도속주화 문제 등이 고루 표현되어 있으며, 대마도를 여전히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취급하고 있어 대마번병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대마번병의식은 현실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하였으며 잔영과 같이 의식의 바닥에 침전되어갔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대마고토의식은 잠재된 형태이지만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만주에 대한 향수, 일제의 농간에 의해 빼앗긴 간도(間島)에 대한 실지(失地) 회복의식과 함께 여전히 남아있다. 대마도영유권과 반환을 주장한 이대통령의 발언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전통적인 대마도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난바 나름대로의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