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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전 통일부 장관/11·12·14·15대 의원
관리자 2013-09-27 235
정책위 세미나/ 한국전쟁 발발의 내막-마오쩌둥과 스탈린 간의 갈등ㆍ암투 (2013.7.9)


이세기(한중친선협회 회장/전 통일부 장관/11·12·14·15대 의원)


한국전쟁 발발의 내막
-마오쩌둥과 스탈린 간의 갈등ㆍ암투-



금년은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전쟁 발발의 기원·배경과 관련 많은 이론과 주장들이 ‘죽(竹)과 철(鐵)의 장막’ 속에서 난무했다. 그러나 구소련과 중국의 관련 정보자료들이 공개되는 등 장막이 겉이면서 논쟁도 종식되고 있다.
한마디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이면의 복잡한 요인들, 특히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 간의 갈등·암투가 중요한 동인(動因: 결정적인 요인)이라는데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같은 합의와 결론은 우연히 필자가 지난 1978년 동경 유학시절 연구한 논문의 추론과 같다는 점에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전쟁을 심층 연구해 온 조갑제씨가 쓴 글(“30여 년 전 李世基 논문의 推論이 적중하다,”『월간조선』2013년 6월호)은 한국전쟁의 내막을 연구한 바 있는 나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한 것이었다.
사실, 30여 년 전 필자의 연구는 어린 시절(1951년) 개성의 고향집에 주둔한 중공군의 기억과 학창 시절 김상협 교수님으로부터 중국을 공부하면서 갖게 된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나는 중국과 한국전쟁을 공부하면서 마오쩌둥이 건국(1949.10.1)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해 왜, 무슨 연유로 70여 일간이나 체류했는가? 마오쩌둥과 스탈린 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라는 의문과 함께, 마오쩌둥의 소련 방문 후 4개월이 채 안된 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한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전쟁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1949년 10월 중공정권 수립 등으로 생겨난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상태에서, 중국을 제어·압박하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스탈린의 대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즉, 스탈린이 김일성을 미끼로 던져 미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뒤, 중국의 등을 밀어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죽도록 싸우게 한 것이었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중소를 이간하려 했던 미국의 대 중소 전략에 대한 스탈린의 대반격이기도 했다. 이는 국공내전 과정에서의 스탈린·마오쩌둥 간의 갈등과 신중국 수립 이후 중소 간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확인된다.

스탈린·마오쩌둥 간의 갈등과 모스크바 회담

신중국의 마오쩌둥은 스탈린과의 회담을 위해 1949년 12월 생애 처음으로 스탈린의 70세 생일(12.17) 축하를 명분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약 70일 동안이나 지속된 모스크바 회담에서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제기한 많은 문제들은 기나긴 고통으로 점철된 양자 간의 갈등과 충돌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양자 간의 심각한 대립과 대결은 한국전쟁 발발과 전쟁의 과정을 좌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우선, 국공내전 시기 스탈린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바라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족과 슬라브족간의 오랜 갈등의 역사와 ‘황화론(黃禍論)’적 시각에 따른 위협 인식에 따라 공산혁명으로 통일된 강한 중국보다는 마오쩌둥과 장제스(蔣介石)가 분열된 채 협력하는 약한 연립정부를 희망했다.
중공혁명과 국공내전 과정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혁명노선 등을 둘러싸고 갈등·대립을 지속했다. 스탈린은 공산당의 마오쩌둥보다 국민당의 장제스를 지원하고, 마오쩌둥을 ‘마아가린 코뮤니스트’라고 비하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잘못된 지도를 거듭한 결과, 중공은 만리장정(萬里長征) 등 엄청난 손실을 당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이 북경을 함락한 후 양자강 도강작전을 불과 3~4개월 앞둔 시점에서도 스탈린은 중공 측에 양자강을 국경선으로 한 휴전을 제의하기도 했다. 동시에 스탈린은 만주지역의 독립 왕으로 군림한 가오강(高崗)과 특별한 관계를 키워갔다.
스탈린이 시종 마오쩌둥을 경계한 이유는 자기 방식의 공산혁명을 추구한 마오쩌둥에 대한 불쾌감, 신중국과 미국 간의 관계 개선 가능성에 대한 경계감과 함께 무엇보다 중공정권 수립은 극동에서 자국의 권익을 보장한 얄타협정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중국의 수립은 미국에게는 중국의 상실을, 소련에게는 얄타협정에 따른 만주에 대한 지배권 상실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중국의 마오쩌둥은 향소일변도(向蘇一邊倒) 정책이 불가피했다. 새로운 정부를 운영하고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다. 소련과의 관계를 평등한 형제당의 관계로 재정립하고, 사실상 소련이 지배하고 있는 만주를 되찾아 오는 일(대륙완정)도 중요한 과제였다.
때문에 모스크바에서의 양자 회담은 순탄할리가 없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전략은 극도로 대립적인 것이었다. 회담은 심리전의 연속이었고, 무자비함과 무례함을 드러낸 대결이었다. 회담장은 마치 악마가 연회를 벌이는 무대와도 같았다. 마오쩌둥은 모스크바 교외의 스탈린 별장에 기거(사실상 연금 상태)하면서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 부지기수였다. 열세인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지속적인 냉대와 고립, 좌절을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의 최대 쟁점은 1945년 얄타회담 합의 이행 차원에서 소련과 국민당 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대체하는 문제였다.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확보한 만주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토해낼 생각이 없었다. 만주에서의 후퇴는 당시 외몽고에서 만주와 북한을 거쳐 연해주와 사할린으로 이어지는 자국의 전략방위선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마오쩌둥을 자신의 종주권 체제에 묶어 제2의 티토가 될 가능성도 차단해야 했다. 
 


미국 ‘애치슨 선언’의 영향

결코 순탄치 않은 모스크바의 중소 동맹조약 협상을 미국이 간과할 리가 없었다. 중소 간의 밀착을 경계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한창 협상중일 때 연이어 중국에  추파를 던짐으로써 회담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려했다.
1950년 1월 5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타이완의 전략적 중요성은 미국의 노골적인 군사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타이완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Crisis in Asia, An Examination of U.S. Policy’)에서 마오쩌둥의 중공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아시아 민족주의를 찬양하면서, 소련이 중국의 북방영토에 대해 야심을 갖고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마오쩌둥이 대소 협상에서 강경 입장을 견지하도록 고무했다. “한국과 타이완은 자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한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등의 내용도 담고 있었다. 미국은 복잡한 방법(차적인 중국을 고무·찬양, 주적인 소련을 견제)으로 중소 간의 협상에 훼방을 놓고,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놓으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이 미국이 결정적인 시기에 중소 간의 틈을 벌려,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애치슨 선언을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양국의 굳건한 단결을 과시하고자 했다. 다음 날(1월 13일)에는 중국내 모든 미국의 시설들의 반환 또는 몰수·폐쇄를 명령했다. 마오쩌둥의 단호하고 직접적인 대응은 스탈린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타이완과 한국에 대한 원조를 재개시킨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약 2개월간의 줄다리기 협상, 우여곡절 끝에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중소 신조약)’에 서명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소련의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장제스가 내버리다시피 한 만주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스탈린은 만주를 고수할 명분이 약했다. 마오쩌둥이 미국으로 접근할 가능성도 우려,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협상의 결과, 마오쩌둥에 대한 스탈린의 불신과 저주는 더해졌다. 특히 애치슨 선언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중국과 미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게 했다. 미국과 중국이 접촉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도 들어왔다.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의 중국을 제어·압박하고, 미국을 견제하는 새로운 책략이 필요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은 좋은 소재가 되었다.

스탈린의 남침 승인, 마오쩌둥 결박
스탈린은 1949년 3월 김일성이 “최초의 일격으로 남침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쟁계획을 접한 적이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남침은 미국과 체결한 얄타협정 위반이 되고, 또 미국이 개입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승인을 거부했다. 1949년 여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후 김일성의 재요청 시에도 스탈린은 “전력상 장기전이 불가피하니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통해 통일할 수 있도록 빨치산운동을 더욱 강화하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50년 1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한반도 적화혁명을 성공할 수 있게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자, 스탈린은 1월 30일 주 북한 슈티코프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나는 김일성의 불만을 이해한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가 이 건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언제라도 만날 용의가 있다. 이상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고 나는 그를 도울 용의가 있음을 전해주기 바란다. 이 사실이 모택동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이 전문은 애치슨 선언 이후 중소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스탈린의 책략이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찬성과 함께 흥미를 표시했지만 그때까지 전면적인 공격의 승인은 유보했다.  미국과의 대결을 촉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충돌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만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제안이 자국이 말려드는 것을 피하면서 중국과 서방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자신의 구상과 계획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스탈린은 자국의 위성국인 북한이 남한을 정복한다면 동쪽 경계를 따라 완충지대를 넓힐 수 있고, 일본에 대한 정치적 수단이 되거나 또는 일본에 대한 공격의 도약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미국의 결단력과 전쟁수행 능력을 시험함과 동시에 미국의 힘을 유럽으로부터 돌릴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소련이 이 모든 것에서 발만 뺄 수 있다면 이익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을 마주한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보고(?)에 기초,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했다. 4월에는 남침을 승인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자국이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며, “해방전쟁은 중국지도자가 승인을 해야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마오쩌둥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혁명의 최종 목표로서 타이완 해방을 계획하고 여기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었다. 타이완 점령을 위해 대안(對岸)에 약 15만 명의 병력과 약 4,000척의 선박을 집결시켜 놓았다. 미국의 국무부도 타이완의 함락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때 스탈린이 선수를 친다. 마오쩌둥의 타이완 상륙작전에 앞서 김일성이 먼저 남침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중국이 타이완을 먼저 공격할 경우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해도 중국군이 참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해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전달했다.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2~3주 안에 남한 점령을 끝낼 것이므로 중국이 군대를 보낼 시간이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마오쩌둥은 깜작 놀라 스탈린에게 이 소식의 진위를 확인해 달라는 급전을 보냈다.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행동을 승인했다는 답을 들은 뒤 마오쩌둥은 동 계획에 동의하는 것 이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오쩌둥으로서는 소련과 경제발전 및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동맹을 맺은 직후였고, 자신을 불신하고 있는 스탈린에게 충성심을 보여줘야 했다.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타이완 침공에 대한 소련의 원조를 약속받은 시점에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강조할 수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원조를 약속하면서도 장기전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이로써 스탈린은 일단 김일성의 남침전쟁에 마오쩌둥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교묘하게 그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전쟁승인 이전부터 소련과 함께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6월 16일 공격개시 준비 완료, 6월 25일 새벽 침공이 결정되었다.

소련의 배신과 중국 참전 유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후 스탈린은 그의 책략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간다. 미국은 유엔안보리 회의 결정(6월 27일)에 따라 즉각 개입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같은 날 미군의 한반도 군사작전을 명령하고 타이완의 중립화를 선언하면서 제7함대에 대해 중국의 타이완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소련은 유엔 안보리의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했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 의도는 미국 등 서방의 참전을 유도해 미중 사이에 분명한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중국과 동구권에서는 소련의 행동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스탈린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1950년 8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코트발트(Clement Gottward)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본심을 털어 놓았다.

  “우리는 미국이 ‘프리 핸드(free hand)’를 갖고 어리석은 짓(한국 파병)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그렇게 했다. ...미국이 극동에서 계속 묶여 있고, 조선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면 미국은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에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제3차 세계대전은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주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스탈린의 거대한 책략은 전쟁 개시 이후 북한군의 조기승리를 방해하는 방법으로 지속되었다. 스탈린은 소련군 고문을 통하거나 직접 김일성의 진격상황을 세부적으로 통제하면서 부산까지의 진격속도를 늦추었다. 북한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제공하지 않았고, 방공무기나 신무기, 도하 장비도 주지 않았다. 또한 자국의 개입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전선의 북한군에 파견되었던 소련군 고문들을 통신장비와 함께 모두 철수시켜 작전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소련의 이 같은 행동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8~9월에 들어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스탈린의 시나리오는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참전), 이제 중국을 불러들여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以夷制夷) 할 필요가 있었다.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오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의 동지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인다", "5~6개 사단이라도 좋으니 38도선으로 즉시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10월 2일부터 시작된 중공 정치국회의는 참전문제를 본격 논의했으나 부정적인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10월 3일, 중국은 주중국 인도대사 파니카(Sadar K.M. Panikar)를 통해 “만약 미군이 38선을 돌파한다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중립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참전 조건과 상황은 미군이 38선을 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경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정보로 평가, 무시하고 38선을 돌파한다.
미군의 북진은 중국에게 큰 안보위협으로 다가왔다. 10월 5일, 마오쩌둥은 정치국회의를 개최, 모든 반대론을 잠재우면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키는 것이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을 결정했다. 이후에도 중국지도부는 참전이 바람직한 가에 대해 2주 동안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10월 1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소련의 충분한 (공중)지원이 없으면 중국은 북한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알렸다. 스탈린은 자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중국의 지연 전술에 확고하게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이 압록강 연변에까지 이르자 북한군의 완전한 패배는 단지 시간문제였다. 다급한 상황에서 여전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던 스탈린은 10월 12일 김일성에게 즉각 한반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스탈린은 북한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0월 13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와 가오강까지 북경으로 불러들인 긴급 정치국회의에서 다시 “우리군대가 조선전쟁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우리가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우리는 반드시 참전해야 하오. 참전하면 우리의 이익에 큰 보탬이 될 것이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참전하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에게 크나 큰 불이익이 될 것이오.

사실, 중국이 지정학적 요충인 북한을 잃는 것은 자국에 지속적인 부담이 되고, 결과적으로 자국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게 한반도 북부지역의 안전은 곧 자국의 동북은 물론 중원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중국이 한반도에서 미국과 대적하는 것은 남쪽의 타이완 또는 베트남에서 대적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서 중국의 참전·반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한 중국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도강, 평안북도 온정 북서쪽 산중에 있는 대유동 광산갱도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0월 25일, 한국군과 첫 전투를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은 사실상 미중전쟁이 되고 말았다.

스탈린의 사망, 휴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개월여 만인 1951년 1월, 교전 양측은 서로 한번 씩 밀고 밀리는 대접전 끝에 한반도 문제가 무력을 통해 해결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국은 1951년 봄 사활을 건 4~5차 전역이 유엔군을 남쪽으로 패퇴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종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휴전 제의를 미국에 대한 굴복으로 비화시키며 반대했다. 회담 과정에서는 미국이 회담의 성사를 더 원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과 북한이 회담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을 계속하게 해 미국과 중국의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양국의 힘을 소진시키려는 스탈린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에 따라 정전회담은 2년 동안 지루한 줄다리기와 공방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자 종전협상은 급속히 진전되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망 후 4개월 만인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8선을 그대로 한 종전 결과를 두고 볼 때, 한국전쟁은 교전 양측이 비기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게임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기간에 약 75-81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했고, 가장 많을 때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120만 명)와 비슷한 130여만 명까지 참전, 39만 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스탈린이 겨냥한 전략목표와  같이 미국과 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분간 서로 화해할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스탈린은 종전 후 20년이라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스탈린이 가장 큰 이득을 본 전쟁이었다.
스탈린이 구상하고 계획한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은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성 확보, 전략적 완충인 북한 보호 및 친 중국화를 이룰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만주작전’을 통해 가오강 일파를 제거해 소련으로부터 만주를 되찾아 대륙의 완전 정복(國土完整)을 이룰 수 있었다. 신중국의 헌법은 가오강을 완전히 제거한 후인 1954년에야 제정되었다.
이렇듯 한국전쟁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양 진영 간의 냉전구도와 함께 공산권 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중소의 힘의 대결구조, 그리고 미중소 3국간의 상호 견제의 역학관계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전쟁의 단초가 된 것은 신생 중국의 마오쩌둥을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종주권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스탈린의 책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憲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