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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위학술세미나2 - 박종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국어학
관리자 2013-06-19 264
정책위학술세미나/ 세종대왕과 한글(생애와 치적․한글) (2013.5.14) 박종국(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국어학) 세종대왕과 한글 -생애와 치적․한글- 1. 머리말 우리 겨레의 위대한 성왕이신 세종대왕은 우리 겨레의 큰 스승이시자 이 세계 전 인류의 큰 스승이시다. 우리나라가 그 유구한 오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세종대왕님 같은 성왕을 모셨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한 없는 영광이요, 영구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 뚜렷한 독립 자존의 겨레 얼, 그 쉬지 않는 문화 창조의 노력, 그 백성을 본위로 한 현명한 민본 정치, 그 학문을 숭상하는 진리의 정신 등등은 우리 국조 단군님 이래 겨레의 이상 「밝은 누리」를 실현하기 위한 영구 불멸의 거울인 것이다. 이렇듯 세종대왕은 위대한 어른이시기에 당대의 백성들은, “동방의 요순(堯舜)이다.”라고 기리었고, 외국 역사가들도 “조선조 여러 임금 가운데 비범한 어진 임금이다.”라고 찬양하였으며, 오늘의 과학 문화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도 우리의 역사를 말하고 문화를 생각하고 도덕을 탄식하고 정치를 근심할 때마다 국민으로서 대왕을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 뿐만 아니다.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대왕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흠모하며 대왕의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소리가 드높은 것이다. 오늘의 21세기는 세계 각국이 문턱 없는 국제화 세계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새 겨레 문화를 창조하여 세계 온 인류를 위해 문화적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종대왕의 정신을 잇는 것이자 한글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제 필자는 여기에서 먼저 세종대왕의 생애와 치적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다음으로 대왕의 여러 가지 공적 중에서 천추 만세에 길이길이 더욱더욱 우리 겨레에게 번영의 은택을 끼칠 것인 훈민정음 곧 한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2. 생애와 치적 세종대왕은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도(祹), 자(字)는 원정(元正)이다. 또 존시(尊諡)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시호(諡號)는 장헌(莊憲)이며, 묘호(廟號)는 세종(世宗)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은 세종(世宗)․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능호(陵號)는 영릉(英陵)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태조 6년(1397) 정축(丁丑)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성부(漢城府)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조선조 제3대 임금이 된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당시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과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태종 8년(1408) 음력 2월 11일(양력 3월 17일)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그해 2월 16일(양력 3월 22일)에는 우부대언(右副代言) 심온(沈溫)의 따님인 심씨(沈氏;경숙옹주)와 혼인하였는데, 이분이 곧 소헌 왕후(昭憲王后)이다. 그 뒤 5년째 되는 태종 12년(1412) 음력 5월 3일(양력 6월 20일)에는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되고, 스물 두 살 되던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3일(양력 7월 15일)에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폐세자(廢世子)가 됨에 따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가 그해 음력 8월 10일(양력 9월 18일)에 부왕 태종의 내선(內禪)을 받아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시니, 조선조 제4대 임금이시다. 세종대왕은 어릴 때부터 그 용모가 단아하고 자질이 총민하며, 성행이 돈독 근면할 뿐 아니라 학문을 즐겨 비록 성한극서(盛寒極署)라도 밤늦도록 글을 읽으며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었으며, 또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대왕의 인품이 어려서부터 이러하니, 부왕 태종은 여러 형제 가운데 나라 일을 부탁하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인정하였고, 의정부(議政府)․훈신(勳臣)들과 육조(六曹)․대간(臺諫) 등 문부백관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임금으로 모셔진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을 위해 백성의 뜻을 따르는 어진 정사를 펴시었으므로, 그 서른 두 해 동안에 민족적으로는 물론이러니와 인류 역사적으로 지극히 우수하고 위대한 민족문화를 발전시켜 그 거룩한 정신과 영세토록 잊을 수 없는 불멸의 업적을 많이 남겨 놓으셨다. 세종대왕께서는 임금으로서의 자세를, “임금은 하늘을 대리해서 만물을 다스리며 백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라고 하고, 치민(治民)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心正 則治民無難] 라고 하였으며, 처사(處事)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心正 則處事無難] 라고 하시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간직하고, 항상 백성의 무식과 가난을 없애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민본 사상을 정치 이상으로 삼으시고, 나라의 발전과 겨레의 번영을 위하여 연구에 직접 참여하심은 물론 비범한 창의와 부단의 열정과 확호한 신념으로 일을 처리하고 살피셨기 때문에 정치․경제․과학․교육․도덕․예술․의학․군사․외교 등 그 어느 방면할 것 없이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여 꽃피웠다. 대왕이 그토록 여러 방면에서 많은 치적을 이룩하게 된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대왕이 오직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애민정신과 겨레의 번영을 위한 자주정신을 밑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고도의 과학 문화 의식을 가지고 정치를 펴신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왕께서 재위 동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하시었는지 그 성업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대왕께서는 매일 윤대(輪對)하고, 경연(經筵)을 열어 강의를 듣고 윤리 도덕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 문제를 논의하여 나라의 전반적인 기틀을 잡는데 먼저 힘쓰시었으니, 특히 세종 2년(1420) 음력 3월 16일(양력 5월 7일)에 확충 대궐 안에 설치한 연구소, 즉 세종문화의 산실인 집현전(集賢殿)에 의해 의례․제도가 개혁 정비되었다. 집현전은 대왕께서 인재 양성과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치한 학문 연구 중심 기관으로 세종시대의 찬란한 문화와 도덕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이에 종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라.” 고 하였다. 그 결과 집현전 학사들은 역사․지리․정치․경제․천문․도덕․예의․문자․운학․문학․종교․군사․농사․의약․음악 등에 관한 편찬․저술된 책 300여 종을 펴내었다. 이 저술․편찬된 문헌들은 우리나라 육백여년에 가까운 문화 생활에 막대한 지침적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구원한 미래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근대 과학 문명의 원천인 활자와 활자판을 개량하여, 서적의 간행을 편리하게 함은 물론 인쇄술의 발달을 꾀하였다. 당시의 금속 활자 개량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5년에 서양식 인쇄 활자를 개발한 것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농사와 문화 생활에 관련을 가진 각종 천문의기(天文儀器)를 제작하고 역서(曆書)를 편찬하였으니, 간의대(簡儀臺) 용 천문 관측기인 간의(簡儀)(대․소)․혼천의(渾天儀;渾儀)․혼상(渾象),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옥루(玉漏),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銅表), 해와 별을 관측하여 시각을 알아내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의 제작, 기상에 관한 기구로서 강우량(降雨量)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河川)의 수위(水位)를 재는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전국 8도에서 우량(雨量)을 조사케 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 사용은 조선조 농업기상학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으로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측우기를 써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는 이것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그 발명은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 리가 만든 측우기(1639) 보다 거의 2백 년이나 앞서는 것인 바 오늘날과 같이 과학 문명이 발달한 때에 있어서도 그 이상의 측우기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대왕께서는 역법(曆法)의 자주적 확립을 위해서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 등을 연구 보완하여 새로운 역서(曆書)를 편찬케 한 바,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간행되고, 이어서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역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본하여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함으로써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역법 수립을 이루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그리어 우주의 이치를 밝히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경제 유통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도량형기(度量衡器)를 바르게 고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물량거래(物量去來)의 공정(公正)을 가져오게 함은 물론, 경제적인 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상의 제도를 만들기 위한 기준에 공헌하였으며, 이 도량형의 표준은 백성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기준량(基準量)이 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나라의 대정(大政)을 함에 있어 생민(生民)의 생활 안정을 위한 요체(要諦)로서 농업진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농업과학의 정립을 위해 ≪농사직설(農事直說)≫ 등의 농서(農書)를 편찬 발간하여 농민에게 가르치고, 제언(堤堰) 개발 및 수차(水車)에 관한 연구로 농산물을 증진하였으며, 조세제도(租稅制度)를 정할 때 온 백성의 민의(民意)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전국 8도의 관민(官民)에게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를 조사(민주적 여론 조사)하는 한편,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종래의 모순이 많았던 조세제도를 전분 육등(田分六等)․연분 구등(年分九等)의 54등급으로 확립,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조선조 5백년 간의 조세제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들의 보건 위생을 위한 보건 의료 정책이나 방역 정책, 의학교육, 법의학의 체계화 등에 있어도 놀라운 업적을 쌓았으니, 우리의 의학은 대왕 때에 와서 더욱 자주적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것으로 뿌리를 내렸는데, 여기에는 대왕의 배려와 해박한 의학지식이 절대적 구실을 한 것이다. 대왕은 대군시절부터 병약한 아우 성녕대군(誠寧大君) 종()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였으며 손수 의학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후에는 의학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으니, 대왕 때 저술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치(의방(醫方類聚)≫ 등의 의서들이 이 사정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그 바탕에 대왕의 창조 정신과 과학적 사고 방식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왕은 언제나 억울함을 당하는 백성이 없게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하기 위해 시체 검안을 ≪무원록(無寃錄)≫을 기준으로 하였고, 더욱 과학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의 저술로 볼 때 법의학을 법률화하였던 선각자라 하겠다. 그리고 이 저작물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법의학 발전에도 지대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들의 정서를 즐겁게 하고 신명이 감동하게 하기 위하여 음악을 짓거나 정리하였는데, 대왕은 음악에 있어서도 주목할 업적을 남겼다. 대왕 때의 음악 문화는 율관(律管)과 편경(編磬)의 제작, 아악보(雅樂譜) 제정, 신악(新樂) 제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조 등으로 크게 나누어 말할 수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 율관 제작과 아악보 제정은 고대의 예악사상(禮樂思想)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악 제작과 「정간보」의 창조는 조종(祖宗)의 공덕을 널리 알리고, 영구히 만세에 전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특히 「정간보」는 당시는 물론, 후대의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실려 있는 일반 향악(鄕樂) 절주(節奏;리듬)에도 채용되어 우리나라 국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왕의 이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가 됨은 물론 서양 음악의 「오선보(五線譜)」가 15~16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함을 볼 때 세계 최초의 유량 악보라 할 수 있으며, ≪세종악보(世宗樂譜)≫는 우리나라 아악(雅樂)의 연총(淵叢)일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음악 연구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자료이다. 대왕의 이와 같은 음악의 업적은, 음악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깊은 관심은 물론 자주정신과 창조정신이 강한 대왕이 음악 이론에 밝고 여러 가지 악기의 연주에도 뛰어난 박연과 같은 전문가를 만남으로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대왕은 박연에게 말씀하기를, “그대는 내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짓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역시 음악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회화(繪畫)와 서예(書藝) 및 도자공예(陶磁工藝) 등에도 적극 힘쓰심으로써 세련되고 격조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니, 서예에 있어서 한글 글씨의 효시가 되는 각판본인 ≪훈민정음≫의 한글 글자체(훈민정음 반포체)와 활자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한글 글자체(훈민정음 실용체) 등의 인쇄체로서의 예술미란 한문 어느 글자체의 글자보다도 격조 높은 체임을 말할 것 없고, 한문 글씨는 대왕의 셋째 아드님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과 시․서․화(詩書畫)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節)이라 얼컫는 강희안(姜希顔)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회화에서는 안견(安堅)과 최경(崔涇) 같은 이들이 독특한 우리나라 화풍(畫風)을 형성하여 후대의 조선 화단은 물론 고려시대와 같이 일본에도 많이 전해졌다. 특히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의 촉(囑)에 의해 안견이 그린 그 유명한 그림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현재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天理大學圖書館)에 진장되어 있다. 또 삽화(揷畵)에 있어서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조선 삽화본(朝鮮揷畵本)의 대표적 예로서 ≪삼강행실도≫ 간본의 변천은 곧 조선 삽화본의 변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적 특색을 보다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은 도자기(陶磁器)인데, 이 때는 고려전통을 이은 청자(靑磁)가 한편으로 제작되었는가 하면, 그 전통에서 변천된 분청사기(粉靑沙器)와 희고 고운 백자(白磁)가 크게 발전하였으니, 대체로 자기(磁器)는 백자를, 도기(陶器)는 분청사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의 자기소(磁器所) 139개소와 도기소(陶器所) 186개소, 도합 325개소의 가마터〔窯址〕가 기록되어 있으니, 이로 보아 당시 도자기의 생산이 얼마나 활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도덕정치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의례․제도의 정비를 위하여 국가의 의례인 오례(五禮)와 사서(士庶)의 의례인 사례(四禮) 등 제반 제도를 연구 정리하였다. 대왕 때 이를 위하여 중심이 된 기관은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집현전 등이었다. 이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고려와 중국의 옛 제도에 의한 것이었으나 대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비판․연구하여 당시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혁 제정하여 풍속을 바로 잡으셨으니, 이도 주체성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또 국민 교육을 위한 윤리․도덕 교과서 ≪삼강행실도≫를 지어 풍속을 권려(勸勵)하였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지어 후세에 제왕의 일락(逸樂)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엮어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본받도록 하였으며,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엮어 전쟁(戰爭)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가장 먼저 나왔을 뿐 아니라, 제일 많이 읽힌 수신서로서 기념물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효․충․정(孝忠貞)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의 사회, 나아가서 나라 존립의 정신적 기반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세종대왕께서는 지식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앙과 지방에 성균관(成均館)․사부학당(四部學堂)․종학(宗學)․향교(鄕校)를 설치하여 교육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과거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이들기관 중 성균관과 사부학당과 종학은 중앙에 있는 교육기관이고, 향교는 지방에 있는 교육기관이다. 당시 성균관은 오늘날의 국립대학 격이고,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 과정 격인데, 성균관의 부속학교라 할 수 있다. 이 사부학당은 그뒤 세조 12년(1466) 관제 개혁 때 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중학(中學) 등으로 개칭되어 이후 사학(四學)이라 불리게 되었다. 종학(宗學)은 세종 9년(1427) 대군(大君) 이하 임금의 8촌까지의 종실(宗室)의 자제와 부마(駙馬)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중앙에 창설한 특수학교로서, 학사(學舍)는 경복궁(景福宮) 궁성(宮城)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밖에 세웠었는데, 종친(宗親)의 자제는 나이 8세가 되면 모두 학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 및 필요성 내지는 활용하는 용도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경서(經書)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이에 유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이 배우기만 하고 사색(思索)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의 이치에 어둡다.[學而不思則罔]” 라고 하였다. 무엇을 공부하든 생각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해 발전성이 없다. 세종대왕께서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히 살리는 데 그 근거가 되는 법을 개혁 정비하였다. 그러므로 인정(仁政)을 위한 새로운 법을 마련하는 데 힘쓰시었으니, 이때에 마련된 법전(法典)이 ≪속육전(續六典)≫과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이다. 이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세종 4년(1422) 음력 8월에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대왕께서 친히 법전의 수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세종 8년(1426) 음력 2월에 ≪속육전≫을 수찬 완료하였는데, 수찬색에서 같은 해 음력 12월에 ≪신속육전(新續六典)≫과 ≪원육전(元六典)≫ 및 ≪등록(謄錄)≫을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세종 15년(1433) 음력 1월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을 편찬 완료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속육전≫의 개수는 계속되었으나, 세종 17년(1435)에 이르러 우선 ≪속육전≫ 편찬 사업이 완결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려고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당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천민인 노비(奴婢)를 하늘이 낸 백성으로 인정해 주고, 죄수(罪囚)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옥 시설을 개선해주었으며, 죄인을 다스림에 있어 율문(律文)에 적합한 조목이 없는 경우에는 법률의 적용을 신중히 하게 하고, 고문으로 죄인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사죄(死罪)는 삼복법(三覆法)을 적용하도록 하고, 고문에 배태형(背笞刑)을 금하였으며, 세종 20년(1438) 음력 11월에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을 편찬 발간함으로 인한 검시(檢屍)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형벌을 공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와 늙은이가 죄를 지었을 때는 구속하거나 고문하지 못하게 하고, 모두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게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산모(産母)와 어린아이의 건강을 위한 공처노비(公處奴婢)의 산아휴가에 대한 법을 제정 실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을 염려하고 구제하는 데에도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을 설치하였으니, 남자 늙은이는 임금이 친히 임어(臨御)하고, 여자 늙은이는 왕비가 친히 연향(宴饗)하며, 주․부․군․현(州府郡縣)에 있는 늙은이는 수령(守令)이 몸소 향연(饗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백 세 이상된 늙은이에게는 매달 술과 고기를 주었고, 90세 이상된 사람에게는 작위(爵位)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이리하여 은사(恩賜)가 미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국사 체계 확립과 개국 시조 추앙을 위해 힘을 쓰셨다. 세종 원년(1419) 음력 9월부터 우리나라 역사 정리에도 힘을 기울이셨으니,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연구하게 하여 국사의 체계를 바로 잡고, 세종 7년(1425) 음력 9월에 국조 단군을 모실 단군사당을 평양에 별도로 세워 봉사하게 하였으며, 세종 11년(1429) 음력 7월에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始祖廟)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한 것은 개국의 시조를 받들어 겨레의 시조로 모시고 민족 주체 의식을 모든 백성들에게 심어주려 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께서는 실록(實錄)과 귀중 문헌 보관을 위해 4대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대왕은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였던 것을 세종 21년(1439) 음력 7월에 성주(星州)․전주(全州) 두 사고를 더 설치하여 세종 27년(1445) 음력 11월에는 태조․정종․태종실록을 춘추관의 실록각과 충주․전주․성주 사고에 나누어 갈무리하게 하였다. 대왕의 이 추가 사고 설치로 말미암아 그 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 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현재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화재 예방에도 힘써 소방체제(消防體制)를 확립하였다. 세종 8년(1426) 음력 2월에 소방 시설면에서의 화재 대비책을 세웠고, 또 그해 같은 달 방화(防火)․소화(消火) 업무를 전장(專掌)하는 기관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여 시민들의 재산 피해를 막았다. 이 금화도감은 설립된 지 4개월만인 같은 해 음력 6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병합하여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에서는 소방(消防)과 금화(禁火) 업무 외에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고 천거(川渠)를 소통시키고 길과 다리를 수리하는 일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간각(間閣)의 제도를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분수에 넘는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생활의 지나친 사치와 참람(僭濫)된 풍습을 막아, 온 백성이 비교적 고루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전주 출척(銓注黜陟)의 법을 지극히 정밀하고 잘 갖추어지게 만들었으므로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가 자취를 감추고 현량(賢良)이 등용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선행자를 표창하여 사회의 도의를 높이려고 하였다. 세종 2년(1420) 음력 1월에는 전국의 이름난 효자(孝子)․절부(節婦)․의부(義夫)․순손(順孫) 등을 표창하고 그들이 사는 고장에 정려(旌閭)를 세웠으며, 그러한 사례를 기록한 책인 ≪효행록≫과 새로 ≪삼강행실도≫를 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읽게 함으로써 본으로 삼게 하였다. 세종대왕께서는 종교에 있어서 불교 진흥에 힘쓰셨다. 조선조는 건국 당시부터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써왔으나, 대왕께서는 인간 생활의 생활 철학인 유교를 장려하여 도덕정치(道德政治)를 구현하는 한편, 집현전관으로 하여금 대승경전(大乘經典)의 대표적인 ≪법화경(法華經)≫ 같은 불경을 베끼게 하였고, 세종 6년(1424) 음력 4월에는 불사(佛寺)를 정리하여 선종(禪宗)․교종(敎宗) 36사(寺) 만을 남겨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하였다. 세종 28년(1446) 음력 3월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자,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 민중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하여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시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가계(家系)와 그 일대기(一代記)를 기록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여, 이를 수양대군이 지어 세종 29년(1447) 음력 7월에 올렸는데, 대왕은 이 ≪석보상절≫을 보시고 친히 석가모니의 공덕을 칭송하여 600여곡의 노래를 지으셨다. 이 지은 노래를 한데 묶어 책으로 내었으니, 이 책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또 대왕은 28년 음력 11월에 언문청(諺文廳;正音廳)을 설치하여, 이 기관을 중심으로 불경(佛經)을 찍는 등의 사업을 폈으며, 세종 30년(1448) 음력 12월에는 유신(儒臣)과 성균관생(成均館生)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생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宮)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여 왕실과 백성들의 복을 비는 자리를 삼았다. 그리고 과거의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 발전에 노력하심은 물론 신앙심을 보이시니, 이로 말미암아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道敎)가 조화된 찬란한 문화가 이루어졌다. 세종대왕께서는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이 거의 대신들과 더불어 모의(謀議)한 뒤에 시행하였으므로 잘못된 일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항상 마음을 열고 간언(諫言)을 구(求)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할말을 다 하도록 하였으며, 직언(直言)이 비록 적중하지 못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았다. 세종대왕께서는 외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중국 명(明)나라와 유대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국방력 강화와 국토 확장에 힘쓰셨다. 성보(城堡)의 수축과 병선(兵船)의 개량, ≪진설(陳設)≫․≪진도(陣圖)≫․≪총통등록(銃筒謄錄)≫ 등 병서(兵書)의 간행과 신 병기(兵器)의 제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즉 해안 방어를 위한 전함(戰艦)을 제조하고, 화약(火藥)을 양산(量産)하고, 화전(火箭)․화포(火砲)를 개량한 결과 천자화포(天字火砲)․지자화포(地字火砲)․황자화포(黃字火砲)․가자화포(架字火砲)․세화포(細火砲) 등의 새 화포 제작과 아울러 사정거리와 적중률을 높이면서 화전의 사정거리는 총통이 길수록 늘어난다는 사실도 구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화전이나 탄환(彈丸)의 발사 과정을 간편하게 하기 위한 화초(火鞘)를 발명하게 되었으니, 화초의 발명으로 현대적인 병기와 그 원리를 찾게한 각종 주화탄(走火彈)의 발명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총통등록≫은 당시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 화포들의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서적인데,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 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업적으로 화포 제조의 방법은 영세토록 전하게 한 것이다. 세종 원년(1419)에는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여 항복을 받음은 물론 경상도 계림부(鷄林府)에 편입시켰다. 세종 15년(1433)에는 최윤덕(崔閏德)에게 명하여 서북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야인들을 토벌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세종 16년(1434)에는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 변경인 함길도 지방의 여진(女眞)을 토벌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함으로써 동북과 서북쪽의 땅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장, 우리 강토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세종대왕께서 김종서에게 말씀하기를,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종시대는 이렇게 동북과 서북쪽의 땅을 확장함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은 만주 남쪽 일대에까지 미치었다. 세종대왕께서 국토 방비책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해문(海門)의 방어는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기계(器械;武器)를 수리하고 호령을 엄중히 하여 항상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처럼 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우리를 엿볼 생각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떳떳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이와 같이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토를 개척하는 한편, 나라 안의 지리(地理)를 조사하게 하여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이다. 이 지리지는 그 뒤 약간의 수정 보충을 가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대왕은 이 지리지 편찬과 병행하여 정확한 실측지도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세조 9년(1463) 음력 5월에 가서 이루어져 그해 음력 11월 세조에게 바친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이때 편찬한 지리지나 지도는 군사상, 정치 행정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은 말할 것 없고, 오늘날 우리 국토 개발에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제작된 「동국지도」는 현재 일본 동경(東京)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진장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위업 가운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으뜸가는 업적은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 곧 「한글」 창제 반포이다. 3. 한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곧 「한글」을 친히 창제 반포함으로써 겨레의 주체적인 문화 생활이 시작되었으며, 겨레문화 발달의 원동력이 된 것인데, 이 일은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상 큰 사건이다. 세종대왕께서 우리 겨레 말에 적합한 우리 글이 없음을 한탄하시고 새 글자 창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결심하게 된 시기는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추정해 보면 ≪효행록(孝行錄)≫ 편찬을 명할 때인 세종 10년(1428) 경부터 세종 15년(1433)으로 여겨진다. 세종 10년경은 이미 대왕의 학문 지식이 가장 익어 있을 때이고, 신하들의 학문도 상당히 진척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0년 음력 4월 16일(무진)조 기록에 우리나라 학자들이 명(明)나라 사신에게 ≪성리대전어록(性理大全語錄)≫을 묻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세종시대의 편찬 사업도 세종 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무렵부터 새 글자 창제를 위하여 글자 창제에 참고할 언어와 문자 및 운서 관련 문헌 등의 자료들을 차근차근 수집 조사 정리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왕은 준비된 모든 자료를 가지고 극비밀리에 직접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였을 것이니, 세종 20년(1438) 경에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종실록≫에 대왕이 세종 21년(1439)부터는 경연(經筵)에 나아가신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세종실록≫ 권제92 세종 23년(1441) 음력 4월 4일(경오)조 기록에, “이 당시에 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고, 또한 글자 전적(典籍)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하였으므로, 드디어 안질을 얻게 된 것이다.[時上勤於機 又喜觀書典日夜不釋 遂得眼疾]” 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대왕이 안질에 걸린 것도 훈민정음 창제의 노고의 결과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대왕의 뛰어난 슬기와 알뜰한 연구와 굳건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창제 반포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새 글자 「훈민정음」을 세종 25년(1443) 겨울까지 다 만들어 놓고도 이를 경홀(輕忽)히 백성에게 반포하지 않고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그 뒤 더 정성을 다해 다듬질하면서, 한편으로는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집현전 응교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수찬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 강희안(姜希顔), 행집현전 부수찬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들에게 훈민정음 제자 원리 등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하여 붙이게 하고, 또 정인지에게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쓰게 하여,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3년만인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훈민정음 해례본)을 간행 백성에게 반포하였다. 세종대왕은 정성과 지혜를 다하여 여러해 동안 연구 끝에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으니, 그 취지와 목적은 무엇인지 우리는 대왕의 말씀인 「훈민정음 서문」에서 알 수 있다. 그 서문을 풀이하면,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에 <대하여>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자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내가 이를 위하여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고 하였다. 이 말은 매우 간결하지마는, 그 글자 창제의 까닭이 다 나타나 있으니, 그 내용을 좀 더 풀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겨레는 중국 민족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말도 또한 중국말과 같지 아니하다. 둘째, 우리나라의 말이 이미 다르니, 중국 글자로는 우리말을 표기하지 못하므로 한자는 우리 국민의 언어 생활의 글자가 될 수 없다. 셋째, 우리 겨레에게는 우리말 표기에 알맞은 글자가 없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글자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딱한 일이니, 이래서는 백성이 잘 살 수가 없으며, 나라가 잘 될 수가 없다. 넷째, 이제 내가 새로 글자 28자를 만들어 내노니, 이 글자가 모든 백성의 언어 문자 생활의 편리 향상과 국가의 문명 발전에 큰 힘이 되기 바란다. 우리는 여기에서 독립 자존의 민족 의식이 천명되었음을 볼 수 있고, 우리 겨레의 독특한 말씨와 글자로서 참된 민족문화를 세워야 한다는 문화 독립의 거룩한 선언을 읽을 수 있으며, 백성이 쉬운 제 글자를 씀으로 말미암아, 밝은 누리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배울 수 있으며, 세종대왕의 높은 이상과 투철한 지혜와 거룩한 덕을 살필 수 있다. 훈민정음은 닿소리 글자(자음자) 17자, 홀소리 글자(모음자) 11자, 모두 28자인데, 닿소리 글자는 사람의 말소리를 내는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고, 홀소리 글자는 하늘․땅․사람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본떠서 만들었으며, 거기에는 우주의 형이상학적 진리가 뒷받침되어 있는데, 그 소리의 짜임은 지극히 과학적이고, 그 글자꼴의 벌임은 그지 없이 정연하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 세계 인류 문자사에서 한글과 같은 깊은 뜻을 품되, 과학스런 조직을 가진 글자로서 철학이 뒷받침하는 글자를 한 사람이 당대에 만들어 낸 글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과연 한글은 우리 겨레의 슬기를 자랑할 만한 가장 중요한 겨레의 유산임을 우리 국민은 자부해도 된다. 세종대왕께서는 새 글자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할 때 다만 하나의 글자로서만 홀로 내어 놓지 아니하고, 한글이 의지하고 설 만한 언저리를 마련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국문학의 첫머리를 열어 놓은 것과, 한문 문헌의 번역을 착수한 것, 우리 나라 한자음의 정리 곧 한문 자전인 ≪동국정운≫과, 중국어 표기 체계의 확립 곧 ≪홍무정운역훈≫을 내놓은 것, 공문서에 한글을 쓰게 한 것, 과거 시험에 한글을 시험 과목으로 정한 것, 별돈〔別錢〕 「효뎨례의」 돈을 주조한 것 들이다. 돌아보건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 반포하실새, 이 새로 난 제 나라 문자 한글에 권위와 품격을 주기 위하여 조상과 국가에 바치는 뜻에서 대왕의 6대 조상의 성덕을 칭송하는 가사(歌詞)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는데, 한글을 주문으로 하여 먼저 쓰고, 그 다음에 한문의 번역을 붙이었다. 제2장을 보면,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여러 바래 가니 根深之本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蕡其實 源遠之水 旱亦不竭 流斯爲川 于海必達 와 같다. 그리고 이 ≪용비어천가≫ 시가(詩歌)에서는 한자어는 한자만으로 표기하고 거기에다 한글로 한자음을 달지 않았다. 제1장을 보면 海東 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 와 같다. 이와같이 표기한 것이 그 바로 뒤에 나온 ≪석보상절≫과 「훈민정음 본문」을 언해한 ≪세종어제훈민정음≫에서는 한자에다 죄다 한글로 한자음을 달아, 올바른 한자의 음을 일반이 알도록 하였다. 그런데 ≪월인천강지곡≫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표기 방법에도 한 큰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글로 된 한자의 음을 한자 앞에 크게 주문으로 내세우고, 그 밑에 한자를 조그마하게 달아 두었다. 이것은 한자어 표기마저 한글로 한 것으로 오늘날 괄호 안에다 넣어둔 셈이니, 대왕께서는 한글 전용까지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왕의 이 글자에 대한 자신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은 바로 한글 전용의 정신이다. 한글 창제 반포와 동시에 세종대왕은 이미 한글 전용의 자세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과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은 한글로 된 우리말 표기의 최초의 문헌들인데, 이것은 모두 국어사는 물론 문학적으로도 아주 가치 있는 시가(詩歌)와 산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겨레의 문학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은 한글을 깨쳐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한글이 이렇듯 훌륭한 과학성과, 그렇듯 긴절한 실용성과, 저렇듯 거룩한 사명과, 저렇듯 주도한 용의로써 창제되고, 반포되었음에도 그 뒤 못난 이 나라의 후손들은 세종대왕의 고원(高遠)한 이상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글자가 지닌 과학적, 민주주의적, 실용적, 반봉건적 성격은 그 빛을 발휘했다. 특수층의 많은 양반 선비들이 한문으로 출세하고, 한문으로 시문을 지어 오는 동안 일부 뜻 있는 양반 선비와 서민 계급은 한글에 대한 연구도 하며, 한글로써 시가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소설을 짓고, 일기를 쓰고, 농사치부를 하고, 편지를 쓰면서 한글과 더불어 살아왔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게 된 19세기 말엽, 민중의 대두와 더불어 한글도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국치시대를 당하여 이 글자는 다시금 된서리를 맞았다. 일제는 역사를 왜곡하고 풍속을 없애고 문화재를 파괴하고 말과 글의 말살 정책을 무자비하게 강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한글이 지니고 난 자주 민주주의적 성격은 그 빛을 발휘했다. 애국학자들은 이 글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고귀한 피를 흘렸던 것이다. 이제 우리 겨레도 광복되어 조국이 되살아나고,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법치국가로서의 면목을 새롭게 한 지 올해로 65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21세기는 과학 문화 민주주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인데 우리의 지도층 일부 인사들은 아직도 한글이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주고 국민들을 결속시켜 주고 문화를 창달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깨치지 못하고, 여전히 상형적 원리를 떠나지 못한 한자를 끔찍이 존중하면서 우리말과 우리글만 쓰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반대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과학 민주정신과 문화 발전을 이해하지 못한 지극히 완고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의 과학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시키는 일은 21세기 과학문화시대 문명인이 마땅히 이루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의무이며 우리 겨레의 조국에 대한 국민적 의무이다. 한글의 세계화도 우리시대에 주어진 우리의 사명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세종대왕의 생애와 치적, 그리고 우리 겨레를 문맹에서 건져 준 나라의 보배 한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해 백성의 뜻을 따르는 민본정치를 실천함으로써 대왕 때는 우리 반만년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의가 앙양되고, 문화적으로는 자주 과학 문화가 형성되어 세계사적으로 볼 때 15세기 세종과학시대를 이룰 만큼 문화가 찬란하였다. 실로 대왕은 세계 인류 역사에서 진정한 민본정치를 실천하신 위대한 대왕으로서 인류의 큰 스승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과학 문화를 여는 역사적 자리에 서 있다. 이제 국제화 세계화 시대, 정보화 사회에 세계 경제 10위권 속에서 어깨를 겨누고 사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우선 할 일은 국민 생활을 과학 민주화하여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들이 이 일들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본받음은 물론 우리 겨레 문화의 터전이자 민주의 근본이며 우리 겨레 생활의 무기인 한글을 굳건히 지키고 연구하고 교육 보급하여 새 겨레 문화를 창조 발전하는 데 힘이 되게 모두가 노력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