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주요사업/활동
  • 연구활동

연구활동

영토문제연구특위 강연회-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대학 석좌교수
관리자 2013-05-28 271
헌정회 영토문제연구특위강연회/ 역사적으로 증명된 독도의 영유권(2013.2.26)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대학 석좌교수) 독도는 한국 땅 1. 삼국시대부터 독도는 한국 땅이다. 독도가 한국 땅인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며 한국의 여러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일본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 주장인가를 독도의 명칭 변화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정부에서 어떻게 관리하여 왔는가를 역사적 사료를 통하여 실증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가 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1500년 전부터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현재 강릉)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의 크기는 1백 리인데, 땅이 험준하여 그곳 사람들이 이를 믿고 신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증왕은 이찬 이사부를 하슬라주의 군주로 삼아 우산국 사람들을 꾀로써 굴복시키도록 하였다. 이사부는 왕명을 받고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도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에 있다. 두 섬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독도는 신라 지증왕 때 우리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며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獨島)를 가리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리나라의 고지도에는 반드시 표시되어 있다. 우산도는 “우르뫼”로서 ‘우르’는 ‘을라’,‘어라’ 등과 같이 ‘어른’을 뜻하며 ‘뫼’는 ‘산’을 뜻한다. ‘우르뫼’는 ‘임금산’의 뜻을 가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우르’는 ‘대나무’라는 여진 계통의 말이므로 ‘우르뫼’는 ‘죽도(竹島)’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울릉도에서는 대죽(大竹)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다. 거기에 비하여 일본측 문헌에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1667년에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출운(出雲:시마네현의 옛이름)의 관리인 사이토(齊藤豊仙)가 번주(藩主)의 명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를 순시하면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송도로 울릉도를 죽도로 호칭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주(隱州:은기도)는 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라고 한다. 술해간(戌亥間:서북방향)에 2일 1야(夜)를 가면 송도가 있다. 또 1일 거리에 죽도가 있다. 속언에는 기죽도(磯竹島: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이 두 섬(송도와 죽도)은 무인도인데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에서 은기(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주 (은주:은기도)로 그 한계를 삼는다” 위의 기록이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책인데 독도와 울릉도를 모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2. 고려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관리 고려시대에는 우산국을 울릉도와 우산도로 파악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우산도와 무릉도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울릉도는 고려시대에는 우릉도(芋陵島)ㆍ울릉도(鬱陵島)ㆍ울릉도(蔚陵島)ㆍ우릉도(羽陵島)ㆍ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울릉도에서 고려 왕조에 조공을 바친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고려 태조 13년(930)에는 우릉도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그들에게 관직을 주었고, 덕종1년(1032)에는 우릉(羽陵) 성주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며, 충목왕2년(1346)에는 동계 우릉도 사람이 조공을 바쳤다. 울릉도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 조공을 바친 것과 달리 고려 조정에서 울릉도를 관리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인종19년(1141)에는 명주도 감창사인 이양실(李陽實)이 사람을 보내어 울릉도에 들어가 과일과 나무 잎이 이상한 것을 취하여 가져왔고, 의종11년(1157)에는 왕이 “동해 가운데 우릉도란 섬이 있어 땅이 넓고 토지가 기름져서 예전에 주현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조사시켰다. 김유립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섬은 땅에 암석이 많아 백성이 살 수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므로 행정구역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그만두었다. 고종30년(1243)에는 최이(崔怡)가 “울릉도는 땅이 기름지고 진목(珍木)과 해착(海錯)이 많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행정구역을 설치하려고 동군(東郡)의 백성을 옮겨 이주시켜 살게 하였는데 그 뒤에 풍파가 험악하여 사람이 많이 익사하므로 그 거민을 파하였다. 고종33년(1246)에는 국학(國學)의 학유(學諭)인 권형윤(權衡允)과 급제(及第) 사정순(史挺純)을 울릉도 안무사를 삼았는데 이때까지도 울릉도에 행정구역을 설치하려는 의욕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울릉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죄수들을 유배시키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신종(神宗)이 신돈(辛旽) 사건에 연루되어 무릉도에 유배되었다가 일본국에 표류하여 귀환한 일이 있다. 고려말에 이르면 왜구의 피해가 많아지는데 우왕 5년(1379)에는 무릉도에 왜구가 쳐들어와 보름이나 머물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다. 3. 조선 초기의 울릉도와 독도 관리 조선 초기까지도 울릉도 지역을 우산국으로 여겼으며, 울릉도는 무릉도 또는 울릉도로 부르고, 독도는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을 것이다. 1)우산도 태종 초기에는 울릉도를 무릉도로 생각하였고 그곳의 주민들을 쇄환하려고 하였다. 태종12년(1412)에 강원도 관찰사가 울릉도에 대해 보고하기를,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 백가물(百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가구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로 옮겨 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 거리입니다. 우마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고성․간성에 나누어 두었습니다.󰡓고 하였다. 위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무릉도 곧 울릉도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은 유산국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산국의 표현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울릉도의 주민들이 아직도 자기들은 우산국 사람이란 역사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17년(1417)에 안무사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우산도에서 돌아와 김인우가 보고한 내용은 울릉도에 관한 내용인데 울릉도라고 하지 않고 우산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도 울릉도가 우산국 지역이었다는 역사 인식 일 것이다. 김인우가 울릉도를 살펴보고 돌아온 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지리 인식이 좀 더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는 우산도와 울릉도를 구분하기 시작하며 독도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7년(1425)에도 전 판장기현사(判長鬐縣事) 김인우를 다시 우산도·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울릉도의 주민들을 쇄환하여 왔다. 김인우를 무릉도의 안무사가 아니라 우산도까지 포함하는 우산도·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세조 3년(1457)에는 전 중추원 부사 유수강(柳守剛)과 영동 지역의 방어 계획을 논의하다가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 읍을 설치하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조정에서는 두 섬이 수로가 험하고 멀어서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바다 가운데 있는 고도(孤島)에 읍을 설치하면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읍을 설치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두 섬에 유랑하여 우거한 사람은 쇄환하지 말도록 조치하여 두 섬에 주민들이 살도록 조치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독도를 우산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람도(東覽圖)를 비록한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울릉도 옆에 우산도를 반드시 그렸다. 조선 초기에는 우산도를 대륙 쪽으로 울릉도의 안쪽에 그렸다. 우산도가 정확하게 현재의 독도처럼 울릉도의 동쪽에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안용복의 독도 지키기 활동이 있은 후에 독도에 대한 정확한 지리인식이 갖추어 진 이후의 일이다. 2)요도 세종때에는 요도(蓼島)문제가 등장하여 이 섬의 위치가 어디인가? 과연 동해상에 존재하는 섬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확인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요도의 위치는 양양부의 청대 (靑臺)위에서나 통천현의 당산(堂山)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북쪽에 있고, 길주의 무시곶[無時串]에서와 홍원현의 포청사(蒲靑社)에서 바라보면 남쪽에 있다고 알려졌다. 세종 12년(1430)에 봉상시윤 이안경(李安敬)이 요도를 방문하고 돌아왔다고 보고하므로 세종은 함길도 감사에게 과거 요도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모두 찾아보라고 지시하였다. 함경감사는 함흥부 포청사에 사는 김남련(金南連)이란 사람이 일찍이 이 섬에 갔다 온 일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세종은 함경감사에게 김남련과 함께 수령을 파견하여 요도의 지형과 뱃길의 험하고 편함을 살피도록 하였으나 요도를 제대로 탐사하지 못하였다. 세종은 강원도와 함길도 감사에게 여뀌섬(蓼島)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함길도 감사는 전지기 전벽(田闢)이 요도를 잘 안다고 왕에게 추천하고 그를 서울로 보냈다. 세종은 동왕 20년(1438)에 강원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이 요도는 비록 모처에 있다고는 일컬어 왔으나, 본시 내왕하는 자가 없었으니, 내가 이미 쇠로한 나이에 감히 그의 탐방을 바라겠는가. 다만 본섬이 양양 동쪽에 있다고만 일컬어 왔을 뿐이니, 어느 곳에 있다는 사실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다.”고 계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세종은 23년(1441)에도 함길도 감사에게 “지난날 강원도의 무릉도를 찾으려고 할 때에 모두 말하기를,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뒤에 조민(曹敏) 등이 이를 찾아내어 상을 탔다. 요도를 찾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조민의 일을 듣고서, 역시 제 스스로 찾겠다고 희망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니, 이로써 본다면, 무릇 토지나 서적을 찾아낸다는 것이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정성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새 땅의 일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만약 그 실지가 없는 것이라면 전하는 것이 어찌 이 같이 오랠 것이며, 말하는 자가 어찌 이같이 많겠는가. 하물며 이 새 땅은 우리 강역 안에 있는 것이니 더욱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하기를 성심으로 하면 반드시 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경은 이를 알아서 함경도내의 나이 든 노인들에게 묻든지 아니면 현상금을 걸이서라도 널리 탐방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세종27년(1445)에는 강원도 감사에게 요도를 잘 아는 남회(南鱠)를 보내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동해 가운데에 요도가 있다고 한 지가 오래고 또 그 산의 모양을 보았다는 자도 많다. 내가 두 번이나 관원을 보내어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남회는 자기가 직접 요도를 본 일이 있다고 말하고 왕명을 받아 이를 탐사하였으나 그도 결국 요도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이후에 요도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으나 혹자는 요도가 독도가 아니었겠는가? 추론하기도 하였다. 동해에는 울릉도를 제외하고 독도 밖에는 뚜렷한 섬이 없기 때문이다. 3) 무릉도 조선 초기에도 왜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태종은 동왕 3년(1403)에 강릉도(江陵道)의 무릉도 거민(居民)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다. 실제로 태종 7년(1407)에는 대마도의 종정무(宗貞茂)가 사신을 보내 울릉도에 대마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겠다고 청하여 왔지만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태종 12년(1412)에는 의정부에서 무릉도의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의논하였다. 태종은 우선 무릉도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동왕 16년(1416)에는 김인우를 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아 조사시켰다. 태종 17년(1417)에는 여러 신하들과 우산·무릉도 주민의 쇄출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도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과 농기구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관리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태종은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고 결론을 내리고 김인우를 다시 우산·무릉 등의 안무사로 삼아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 세종 1년(1419)에는 무릉도의 남녀 17명을 쇄환하여 경기도 평구역리(平丘驛里)에 정착시켰다. 세종7년(1425)에는 태종 때에 안무사로 활동하였던 전 판장기현사 김인우를 우산도·무릉도 등지의 안무사로 삼아 그곳 주민들을 쇄환하도록 조치하였다. 세종 18년(1436)에는 무릉도의 우산(牛山)에 마을을 만들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 중종때에도 울릉도는 무릉도로 불리었다. 4) 삼봉도 조선 성종 때에 삼봉도 문제가 조정에 제기된 것은 성종1년(1470)에 영안도민들이 부세(賦稅)를 피하여 삼봉도에 투왕(投往)하는 자들이 있다는 영안도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의 보고에서 비롯된다. 조정에서는 이계손에게 정황을 잘 정탐하라고 지시하고 이어서 강원도 관찰사 성순조(成順祖)에게 영안도(永安道)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몰래 무릉도(茂陵島)에 들어간 자가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삼봉도가 무릉도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병조에서 강원도에 있는 삼봉도를 찾기 위한 8개조의 절목을 마련하여 보고하였는데 그 중에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초마선(哨馬船) 4척(隻)에 각각 군인 40명을 정하되, 본도 군사의 무재(武才)가 있는 자와 자원하여 응모한 사람 17명을 가려서 충당한다. 1. 부령(富寧) 사람 김한경(金漢京)이 삼봉도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함께 들여보낸다.“ 초마선 4척에 40명씩 태우면 총 병력은 160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선단를 보내는 것이었으며 길 안내자로 김한경을 대동시켰고, 왜 통사와 여진 통사 1인씩도 보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는 삼봉도에 여진인이나 왜인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삼봉도 경차관은 박종원(朴宗元)이었는데 성종은 삼봉도는 우리 봉역(封域) 내에 있다고 주지시키고, 그 곳은 바닷길이 험악해서 부역(賦役)과 조세(租稅)를 도피한 자가 몰래 들어가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잘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박종원은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삼봉도를 수색하였지만 풍랑을 만나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이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월 28일에 울진포(蔚珍浦)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를 바라보니 15리(里) 쯤 되었는데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纜]이 끊어져서 대양(大洋) 가운데로 표류하여 동서를 알지 못한 지 7주야가 되었다가 이달 초6일 오시(午時)에 간성군(杆城郡)의 청간진(淸簡津)에 이르렀습니다.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竹]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數竿]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6일에 강릉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 보고서에 보면 박종원은 대풍을 만나 7주야를 바다에서 헤메다가 간성군 청강진에 도착하였으며, 나머지 3척은 무릉도에 도착하여 수색하여 보았지만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하고 옛 집터만 확인하였으며, 주민들을 만나지 못하고 그곳의 특산물인 대나무만 몇 그루만 베어 왔다. 성종은 박종원의 삼봉도 수색은 실패하였으므로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에게 이전에 삼봉도를 다녀 온 종성(鍾城)에 사는 친군위(親軍) 노의순(盧義順)에게 삼봉도의 정보를 확인하여 수집하도록 하였다.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은 성종의 명을 받고 노의순과 동행하였던 영흥 사람 김자주(金自周)에게서 삼봉도의 정보를 수집하여 왕에게 보고 하였다. 김자주는 삼봉도를 직접 가보았으며, 삼봉도의 도형을 그려 가져 와서 이를 조정에 바쳤다. 김자주는 자기가 삼봉도를 다녀온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경성(鏡城)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4주(晝) 3야(夜)를 가니, 섬이 우뚝하게 보이고, 사람 30여 명이 섬 입구에 벌려 섰는데 연기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흰 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조선 사람이었는데, 붙잡힐까 두려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김자주는 경성에서 3박4일을 걸려 삼봉도에 도착하였으며, 그 곳에서 30여명의 주민을 발견하였고 그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조선 사람이라고 하였다. 성종은 김자주)와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한경(金漢京)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삼봉도를 조사시켰다. 이들은 동년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瓮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1박하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2박하였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3박하였다. 여기에서 1주일을 항해하여 25일에 삼봉도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였다. 이들이 섬을 관찰해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하는 것을 보았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섬 모양을 그려 왔다. 위에 김자주 등이 관찰한 삼봉도는 앞서 김한경 등이 관찰한 삼봉도와 매우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항해 일 수인데 통상 3박4일이면 울릉도에 도착하는데 이들은 1주일만에 삼봉도에 도착하였다. 둘째 섬의 모양을 설명할 때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하는 것을 보았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었다,”라는 점 등은 울릉도에 대한 설명 보다 지금의 독도를 설명하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두 사실로 미루어 많은 학자들이 김자주가 갔다 온 삼봉도는 오늘날의 독도로 보고 있다. 조정에서는 지난번에 박종원(朴宗元)이 강원도에서 배를 출발했다가 바람을 만나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이번에 김한경 등이 경성 옹구미에서 배를 출발하여 다시 그 길로 출입하면서 섬 모양까지 그려 왔으므로 이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소문은 소문을 낫기 마련이므로 삼봉도에는 연안의 주민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하여 입도한 인원이 천여명이 이른다는 보고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초마선 50척[隻]을 제조하여 이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초마선에 40명이 승선한다면 2,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대규모의 삼봉도 토벌군을 보내기 전에 삼봉도에 사신을 보내 이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 유시문에는 “만약 전의 잘못을 뉘우쳐 깨닫고 서로 이끌고 돌아오면 창의(唱義)하여 우두머리가 된 자는 벼슬로 상을 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전의 죄는 모두 용서할 것이나, 만일 혹시 끝까지 깨닫지 못하면, 장차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반드시 없애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삼봉도 토벌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으며,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4. 안용복의 울릉도와 독도 지키기 1)안용복의 울릉도와 독도 지키기 잠잠하던 울릉도와 독도 문제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된 것은 숙종19년(1693)에 울산에 사는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 부근에서 고기를 잡다가 왜인들에게 일본으로 붙잡혀 갔기 때문이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도쿠가와 막부의 관백은 안용복과의 대면 후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길에 장기(長崎: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주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하여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울릉도)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안용복을 묶어서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였다.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송환하면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보내 우리나라 사람이 죽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우리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귀경(貴境)의 죽도에 들어가게 하겠습니까?”고 답변하였다. 귤진중은 우리나라의 회답하는 서신중에 󰡐우리나라의 울릉도란 말󰡑을 보고는 매우 싫어하여 이를 빼줄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였다. 위의 사실을 젊은 사신(史臣)들이 논평하기를 “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인데, 울릉이란 칭호는 신라․고려의 사서(史書)와 중국 사람의 문집(文集)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가 가장 오래 되었다.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또한 죽도란 칭호가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명칭인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이란 명칭은 숨기고서 다만 죽도에서 고기잡이한다는 이유를 구실로 삼아서, 우리나라의 회답하는 말을 얻어서 그 금단(禁斷)을 허가받은 후에 이 문서를 근거로 울릉도를 점거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다”라고 준열하게 비판하였다. 안용복은 제1차로 도일(渡日)로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숙종22년(1696)에 제2차로 울릉도에 들어가서 일본 어부들을 내쫒고 일본국 백기주(伯耆州)로 들어가 왜인(倭人)과 담판한 뒤에 양양현으로 돌아왔다. 비변사에서 안용복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안용복이 말하기를, 󰡒저는 본디 동래에 사는데, 울릉도에 들어가 보니 왜선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우리나라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하므로, 제가󰡐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고 물었더니 왜인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가마솥을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자기들의 짐을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옥기도 도주는 자기의 상관인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을 참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였습니다. 백기주 태수가 묻기를, ‘당신은 어찌하여 들어왔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내가 전일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나의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차왜(差倭)를 보내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 하였더니, 백기주 태수가 허락하였습니다. 제가 이인성(李仁成)으로 하여금 소(疏)를 지어 바치게 하자, 대마도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 태수에게 간청하기를, 󰡐이 소를 올리면 내 아들이 관백에게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고 하소연하므로 제가 관백에게 소장을 올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울릉도를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백기주 태수가 저에게 말하기를, 󰡐두 섬(울릉도와 독도)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라고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저에게 양식을 주고 차왜를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안용복은 첫째 울릉도에서 왜인과 충돌하였을 때 그들이 송도(독도) 사람이라고 칭하자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리나라의 자산도(子山島:于山島:독도)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그들을 쫓아 독도에 들어가 왜인들이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는 것을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어 내쫓았다. 둘째 안용복은 백기주로 가서는 울릉 자산 양도 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 칭하고 교섭하였다. 셋째 우리나라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시켰다. 넷째 ‘두 섬(울릉도와 독도)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한다’는 약속을 받고 귀국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 울릉도와 독도의 수토(搜討) 조정에서는 왜인들이 울릉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 오랫동안 울릉도와 독도를 비워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앞으로는 3년마다 1회씩 지방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 정세를 살펴 관리하도록 하였다. 숙종25년(1699)에는 강원도 월송만호 전회일(田會一)이, 숙종28년(1702)에는 삼척영장 이준명(李浚明)이 울릉도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울릉도 등을 수토하는 일은 뱃길이 멀고 파도가 험하며,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수토를 기피하려 하였다. 숙종43년(1717)에 강원감사 이만견(李晩堅)이 울릉도 수토는 빈 섬을 확인하는데 불과한데 민폐가 심하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일시 중지되기도 하였으나, 숙종때처럼 왜인들의 범경사(犯境事)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3년마다 1회씩 계속 수토(搜討)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지켜 왔다. 5. 대한제국의 울릉도와 독도 관리 1) 울릉도 검찰사(檢察使)의 파견 안용복 사건 이후로 조정에서는 3년마다 1회씩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 관리하였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울릉도와 독도 주위에 포경선(捕鯨船)을 비롯한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 빈번하여지고 열강들은 울릉도의 삼림을 불법으로 채취해 갔으므로 정부에서는 이를 단속하기 위하여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감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울릉도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이규원은 배 세척에 102명으로 된 대규모 조사단을 편성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하고 그 보고서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제출하였다. 가)울릉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140명인데 전라도 주민이 115명(82%)이고, 강원도 주민은 14명(10%)이며, 경상도 주민이 10명(7%)이고, 경기도 주민은 1명(0.7%)이었다. 나)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선박을 만드는 사람들로 129명(92.2%)이고 ,인삼 등 약초 캐는 사람이 9명(6.4%)이었으며, 대나무를 베어 생게를 유지하는 사람이 2명(1.4%)이었다. 다)울릉도에 불법적으로 침입한 일본인은 78명이었으며 라)울릉도의 장작지포에는 “대일본제국 송도규곡 ,명치2년2월13일 암기충조 건립”이라는 푯말까지 세웠음을 발견하였다. 마)울릉도 내에 주민이 상주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조사해보니 나리동을 비롯하여 6-7처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었다. 이규원은 울릉도를 적극 개척하여 활용할 것을 건의 하였다. 2) 울릉도 재개척 사업 이규원의 조사 보고서를 검토한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1883년 3월에는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使)”로 임명하였고, 1883년 4월에는 최초로 16호(戶) 54명의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일본인 들 중 불법 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모두 강제로 철수시켰다. 그 후 울릉도의 행정을 전담하는 도장(島長)을 두고 울릉도를 관리하다가 1895년에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어 관리하였다. 6. 근대 독도에 대한 역사적 인식 1)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밝혀 주는 근대문서(近代文書)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들 수 있다. 이 칙령은 울도군 설치에 관한 칙령인데 그 내용 제1조 1900년 10월 25일자로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제2조 울도군의 관활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활할 사”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방언에는 돌을 독이라고 발음하며, 돌섬을 “독섬”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음역하면 “독도”이고 의역하여 “석도(石島)”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살펴보면 17세기에 만들어진 “동여비고”가 있다. 이 지도책에는 영암 앞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돌섬을 독도(獨島)라고 표시하였으며,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군산 앞 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돌섬을 독도(獨島)라고 표기 하였다.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시마네현의 현보에 이 사실을 조그마하게 고시한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울도군을 설치하고 독도를 울도군이 관활한다는 사실을 황제의 칙령으로 반포하고 이를 관보에 수록하여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지방 관청인 시마네현에서 고시하였으며, 지방신문에 2단으로 조그마하게 보도한데 불과하다. 2)독도(獨島)라는 명칭의 사용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코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긴급 보고서에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일본 정부의 “독도 불법 강점” 고시 일본 시마네현에는 나카이사브로(養正三郞)라는 어부가 있었다. 그는 독도 주변에서 바다사자를 잡는 어부였는데 바다사자를 사냥하는 어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이익이 적었으므로 그는 독도 주변 해역에서의 바다사자잡이를 독점하고 싶었다. 그도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한국에 독도를 빌려달라는 “독도대하원(獨島貸下願)”을 제출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협의하고자 동경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수소문하였다. 그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으므로 동해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시기에 나카이의 제의가 있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그를 설득하여 일본 정부에 “독도대하원(獨島貸下願)”을 제출하도록 종용하였다. 나카이의 서류를 접수한 일본 정부는 각 부처마다 의견이 차이가 있었다. 외무성은 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불법 강점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를 1905년 2월 15일의 내각 훈령 87호로 시마네현의 지사에게 통고하였다.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자에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를 발표하여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시마네현의 고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시마네현은 이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이 고시 내용은 그 곳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에도 이틀이 지난 1905년 2월 24일자에야 조그맣게 보도되었다.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는 조치를 중앙정부에서 고시하지 않고 중앙 일간지에도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째로 병합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독도를 편입하고 열강의 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동경에서 이 문제가 알려지면 동경에는 한국의 공사관도 있고 한국 유학생도 많았으므로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져 우리나라의 강력한 항의를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4) 일본의 독도 불법 강점에 맞선 대한제국정부의 조치 1906년 3월28일에 일본의 시마네현의 신서(神西)사무관과 은기도사 일행은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려다가 풍랑을 만나 울릉도에 기착하였다. 그들은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독도를 불법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문서를 작성하여 정식으로 제출하지도 않았으며 처음부터 이를 통고하려고 울릉도에 들른 것도 아니었다. 아마 풍랑이 심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의 시찰단은 울릉도에 기착하지 않고 그대로 오끼섬으로 귀항했을 것이며 어쩌면 한국은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강점한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재빨리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서”를 올려 일본이 불법적으로 독도를 강점하려는 사실을 알렸다. 그 보고서에는“본군 소속 독도가 울릉군의 바캍 바다 백여리 쯤 떨어져 있었는데 일본의 관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의 관활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自云 獨島 今爲日本領地故 視察次來島)”라고 합니다.“로 되어 있다.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긴급히 보고하고. 내부대신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라고 지시하였고, 참정대신도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전혀 근거없는 주장에 속하나......”고 반박하고 앞으로 일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이후 우리나라는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므로 내정마저 간섭받는 입장이 된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더 이상의 항의 조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고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소속되었는데 왜인이 자기들의 땅이라고 제멋대로 말하면서 시찰하고 돌아갔다.”고 항의하는 기록을 남겼다. 6. 서양인의 독도 인식 서양인들이 만든 지도에 우리나라가 나타나는 것은 16세기 말부터이지만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하게 표시된 지도는 1710년대에 프랑스의 신부로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레지( Regis, 雷孝思)가 만든 지도이다. 그는 이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중국식 발음대로 울릉도를 Fan-ling-tao로, 독도는 Tchian-chan-tao로 표기하였다. 독도를 Tchian-chan-tao로 표기한 것은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 잘못 읽어서 Tchian-chan-tao로 표기하였는데 두 섬을 너무 대륙 연안에 붙여서 그렸다. 그 후 1737년에 프랑스의 당빌(J.B.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도에서도 레지 신부와 마찬가지로 울릉도를 Fan-ling-tao로, 독도를 Tchian-chan-tao로 표기하였다. 1797년 라 페루즈가 동해를 탐사하면서 울릉도를 발견하고 그 배에 탔던 천문학자 다쥬레의 이름을 따서 다쥬레섬이라고 하였다. 이 명칭이 서양에 알려져 울릉도는 다쥬레 섬으로 오래 동안 불러졌다. 독도는 1849년에 프랑스의 고래잡이 어선 리앙쿠르호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배 이름을 따서 독도를 리앙쿠르 암(岩)이라고 명명하였다. 서양에서는 상당기간 동안 독도가 리앙쿠르 암이라고 불러지게 된다. 그러나 독도는 외국의 수로지에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아 이곳을 지나는 배들은 저마다 독도의 별칭을 부치게 된다. 1854년에는 러시아의 팔다 호에 의하여 메나라이암과 올리부차암이라고 명명되었으며,1855년에는 영국의 호넷트호에 의하여 호넷트섬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독도는 서양에서 리앙쿠르암이나 호넷트암이라고 불렀으며 그 중에도 리앙쿠르암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7. 일본인의 독도 인식 1)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쿠가와 막부가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이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가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한 일이 있었다.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둘 때이었는데 오오다니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울릉도를 무인도로 착각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백기주 태수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이들은 1661년에는 “죽도근변송도도해건(竹島近邊松島渡海件)”을 청원하여 송도(松島:독도) 도해 면허도 받았다. 도해면허증은 기본적으로 어업 활동을 보장한다는 어업조업권이지 영토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문서이지만 위의 사실은 오히려 한국에게 유리한 증거다. 만약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면 자기 국민이 자기 나라의 영토를 출입하는데 무슨 면허가 필요하겠는가? 일본인들이 일본 시마네현의 오끼섬이나 니이카타현의 사토 섬에 출입하는데도 면허가 필요했던가? 아니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왕조의 영토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도해면허증을 내 주었던 것이다. 2) 근대 메이지정부의 울릉도와 독도 인식 메이지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첫 번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문서가 일본 외교문서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메이지정부는 신정부 수립 후 1869년 12월에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 등을 부산에 파견하여 14개의 항목을 정탐하여 오라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조선의 부속(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죽도와 송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 보고서에서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이웃 섬으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지만 조선의 영토”라고 보고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문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자료이다. 메이지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한 그 두 번째 증거는 1876년에는 일본 내무성이 일본 전국의 지적(地籍)을 조사하여 근대적 지도를 만들려고 할 때의 내무성 문서이다. 이 때 시마네현의 지적 담당자는 동해에 있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내무성에 질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라는 결론을 내고 일본의 지적 조사에서 이 두 섬을 제외하도록 조처하였다. 위의 두 문서처럼 일본의 공문서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한국의 영토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일본인들의 독도 명칭 인식 일본인들은 17세기부터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르고 독도는 송도(松島)라고 불렀다. 그런데 1791년에 영국의 콜넷트 가 북위37도 52분, 동경 129도 53분에 섬이 하나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이 섬을 자기들의 배이름을 따서 알고노트 섬이라고 표시하였다.1840년 시볼트는 울릉도를 다쥬레 섬이라고 쓰고 덧붙혀서 일본식 별칭인 마쓰시마(松島)를 병기하고, 알고노트섬에는 다케시마(竹島)라고 병기하여 두 섬의 명칭에 혼동을 가져왔다. 콜넷트가 알고노트 섬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 연안에 있는 죽도를 잘못 알고 명명한 가상의 섬이다. 일본은 다께시마가 두 곳이 되자 혼동을 참지 못하고 알고노트섬을 죽도라고 하고 종래 그들이 죽도라고 하던 독도는 서양인이 붙인 리랑쿠르암에서 따온 리앙코 섬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1880년에 군함 천성호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정밀 측량하고 울릉도가 그들의 지도에 표시한 송도임을 알고 종래의 죽도라고 부르던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독도는 리앙코섬이라고 부르다가 1905년에 시마네현에 불법 편입시킨 후에는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8.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과 독도 영유권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의 제국주의는 패배하였다.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평화회의가 열렸고 일본이 불법적으로 차지하였던 다른 나라의 영토도 모두 되돌려 주기로 하였다. 회담을 진행하면서 여러 차례의 회의 초안이 마련되었다. 연합국의 제1차초안(1947.3.20.)과 제2차초안(1947.8.5.), 제3차초안(1948.1.2.), 제4차초안(1949.10.13), 제5차초안(1949.11.2.)까지는 독도가 우리나라영토로 명기되었다. 그런데 제6차초안(1949.12.29.)에서 갑자기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바뀌었다. 이것은 일본측의 집요한 로비 때문이었다. 이 초안을 본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한 항의가 있었는데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의 항의가 있었다. 이 중 영국은 3차에 걸쳐 독자적인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첨부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를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SCAPIN(연합국최고사령부) 677호에는 독도가 한국 땅임을 분명히 밝히고 첨부된 지도에도 경계를 확실히 하여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표시하였다. 9.맺음 말 독도는 이름과 달리 하나의 섬이 아닌 두 개의 큰 섬과 89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졌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높이가 98.6m이고 둘레는 2.8km이며 면적은 73,297㎡이다. 서북쪽에 있는 서도는 높이가 168.5m이고 둘레는 2.6km이며 면적은 88,639㎡이다. 두 섬을 합한 독도의 면적은 187,453㎡이다. 독도는 위에서 사료를 통하여 살펴 본 것처럼 512년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한 이래 우산도(于山島)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영토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포경선들이 출몰하여 독도를 마치 무주지인 것처럼 오인하고 리앙쿠르 암이나 호넷트 섬 등으로 명명하였다.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라고 독도를 송도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고 독도는 리앙코島라고 불렀다. 1905년 독도를 불법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할 때에는 다시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부터 오랫동안 우산도라고 부르던 독도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바위섬이라는 뜻으로 독도(獨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독도는 첫째 우리의 영해 표시와 EEZ의 획정 등 우리의 주권을 분명히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이고, 둘째 주변의 어업자원이 무궁무진하며 특히 냉동 가스는 전국이 30년 쓸 분량이 매장되어 있는 자원의 보고이며, 셋째 오염되지 않은 주변의 심층수는 우리 미래의 식수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한국의 영토이다.